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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Oct 05. 2023

가을

태어난 날

  어느 순간에 훌쩍 그때로 돌아와 앉아 전할 말들을 떠올립니다. 

  어째서 직접 건넬 수 없을까 먼저 생각하기 전에 그때와 같이 이름 부를 필요도 없이 할 말부터 떠오릅니다. 누구보다 친밀하고 허물없이 느껴지는 사라진 세상 안에서 그때처럼 호흡합니다. 함께 있을 땐 도리어 전하지 못했을 말들을 마음껏 떠들기 시작합니다. 눈을 마주치며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마음대로 천진하게. 나는 어릴 적부터 세상이 서글프고 아쉬워 무심한 얼굴 안 눈 안에 몰래 슬픔을 담고 안 보이는 손 끝으로 슬픔을 뚝뚝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거나 자꾸만 들여다봐 상대방의 심정을 눈치 채거나 하지는 못하고 비로소 혼자가 되었을 때라야 마음껏 서운해하고 그리워하며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모두 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늘 섣불리 끝맺고 뒤돌아 나오는 방법 밖에 몰랐으므로 얼마 못 가 자꾸만 굳은 채 얼어버립니다. 그리움으로 몸이 묵직해집니다. 서늘하게 빈 곳에 하염없이 머문 느낌입니다. 혹은 깜빡 속아 엉엉 울었지만 사실은 가늠할 수 없이 깊고 따뜻한 물 속에 내내 있었던 것 같이 헤아릴 수 없이 행복했다고 감각합니다. 해서 누군가에게 울음과 원망, 서러움 담아 던지듯 징징대고 싶은 계절입니다. 울면 누군가 오는 시절이 지났다는 걸 알지만. 나는 가을에 태어났습니다.


  지난 나를 기억할 수 있으면, 그때로 돌아가 앉게 되면, 그때의 내가 되면 곧장 말을 건네게 됩니다. 곧장 그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리웠다기보다 비로소 명료하게 깨어난듯이 감각합니다. 눈 깜짝할 시간에 태연하게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아서 지금의 스스로를 비난 섞인 눈길로 그러나 애정을 담아 안타까운 듯이 바라봅니다. 그간의 시간은 없었던 것처럼, 잠에서 깨어난 어린애처럼. 마치 반말 하는 것처럼 들리는 조심성 없는 존댓말로 인사 따위 없이 지금껏 말을 나누며 붙어 지냈던 것처럼 천연하게 말을 이어나가듯이, 장난기 어린 눈길로 세상에서 가장 만만하고 신뢰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그간의 세월은 싹 무시하듯이 부담 하나 없이 말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이제야 말을 하는 것처럼 무언가 시원합니다. 거기는 잃어지지 않는 나의 집입니다. 떠나오며 잘라냈다 여겼지만 영영 사라지지 않는 더 자라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는 나의 집입니다. 계절이 다시 돌아와 그때와 같은 느낌의 공기에 휩싸이면 저절로 열쇠가 되어 문을 열어버립니다. 깨물었을 때 흠뻑 배어나온 차가운 감촉, 맛과 향. 살아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몸을 흠뻑 적시도록 쏟아져 내린 차가운 인식은 영원은 순간 속에 맛볼 수 있도록 들어있는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시간의 순서에도 상관없이 열쇠만 얻으면 나는 꿈을 꾸거나 꿈을 꾸지 않고도 생생히 그때로 돌아가 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나는 시간을 뒤죽박죽 정리되지 않은 채 모여있는 종이 서류 같이 소리 내어 뒤적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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