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주 Oct 06. 2023

가을 날씨

2023-10-06

  가을에는 자발적으로 한낮에 나가 기꺼이 혼자서 걷게 됩니다. 오직 가을에만. 아무래도 가을을 타는 것 같아요. 그림자, 참새 떼가 바람에 우수수 쏟아지는 낙엽처럼 떼로 자리를 옮기는 것, 괴상한 소리를 지르는 왜가리, 한적하고 서늘한 골목, 모녀가 듣기 좋게 소녀처럼 깔깔깔 웃는 소리, 서점 안에서 본 긴 곱슬 머리를 하고 고동색 가디건을 입은 근사한 사람, 서점 입구에서 영어로 욕을 계속해서 뱉고 서 있는 사람, 다리 아래를 지날 때 천장에 물빛이 선명하게 어른거리는 광경, 귀여운 새까만 개 두 마리(한 마리는 철물점 앞에 나란히 앉은 아저씨들 곁에서 묶이지 않은 채 뒹굴었고, 나머지 한 마리 역시 줄 없이 대문을 열고 나오는 아저씨 뒤로 조용히 의젓하게 튀어나왔습니다) 등을 구경했습니다. 평소에 나는 거의 아무런 자극도 받지 않으려 집에서만 지내는 편입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 심하게 그랬습니다. 미친듯 쏘다니고 싶은 날씨입니다. 가을은 종일 빛의 색이 가슴 저미게 아름답습니다. 밖으로 나가 걸으면 땅을 딛고 살아가는 실감이 쉽게 납니다. 빛 때문에 모든 게 아름답게 보입니다. 어디든 참여하고 싶어집니다. 오래도록 걷자 몸이 노곤하게 데워져 좋았습니다. 


  걸으면서 나는, 나의 정신은, 나라는 것은, 존재는 무얼 가슴 깊이 사랑했는지로 나타낼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사라진 뒤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하고 생각하다가 그땐 더는 내가 아닐텐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나? 하고 생각하다 그럼 나라는 건 뭔가? 생각하다 무얼 가슴 깊게 또 죽어서도 사랑하는가 잃어지지 않는 건 무엇인가 그럼 그게 자신이겠구나 이렇게요. 나라는 건 그 기억일 뿐이겠구나. 그게 사라지면 아무것도 아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랑했던 사람에 관해 기억할 수 없으면 더는 내가 아니겠구나, 그럼 그건 죽음일까? 새로운 삶일까? 그러나 이렇게 쓰면서 생각해보니 그럼 치매라는 슬픈 병은? 그 병에 걸리면 그 사람이 아니게 되나? 뇌 어딘가의 문제라면 다른 몸 속 어느 부분의 문제와 똑같은 것인데 어디 몸이 아프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닌데, 그럼 기억을 잃는다고 자신을 잃는 거라고 말할 수 있는건가? 해서 모르겠습니다. 


  생기지 않을 일이지만 날씨가 오늘 같이 내내 이어진다면 좋겠다는 쓸모없는 말이 미련스럽게 생각나는 서늘하고 투명하고 느긋한, 여유롭고 운치 있는 날씨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가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