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야구장에서 만난 몽테뉴의 '수상록'

by Golden Tree

야구가 미치도록 보고 싶은 밤


2024년 겨울은 유독 길고 지나치게 지루했다.

국가의 안녕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걸 깨달은 시간이기도 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조금만 참으면 모두 해결되겠지'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되새김질하였으나, 내가 겪은 내란통(12.3 내란으로 경험한 몸과 마음의 통증)은 꽤 심각했다. 마음이 답답하니 삶은 지독하게 무기력해졌다. 몇 년간 루틴처럼 정해 놓은 일상은 망가지기 시작했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을 목도하며 분노는 한도를 초과했다. 이래저래 만신창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이 사십 넘어 내 안에 숨겨진 애국심과 마주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으나 버티기 힘들었다. 날씨가 조금씩 따뜻해지며 내 마음의 통증도 회복되고 있으나 아직 완벽히 일상을 회복했다고 보기 어렵다. 모든 것이 해결되길 염원하며 봄이 오길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기다렸다.


긴 겨울의 끝자락에서 누구나 따뜻한 봄을 기다리겠지만 겨울에 태어나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덕에 그 누구보다도 봄을 기다리는 편이다. 그리고 내가 봄을 기다리는 가장 큰 이유는 야구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더욱 봄을 기다렸다. 답답한 마음이 야구를 보며 조금씩 희석되길 원했다. 2025 야구 개막을 그 어느 때보다 기다렸다.


드디어 2025 시즌이 개막했다.


어느 구단이나 첫 승리를 염원하는 열기로 뜨거웠고 시간 맞춰 광클을 시도했으나 표를 구하긴 힘들었다. 선수들의 표정에서도 열심히 연습하고 준비한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장했다. 프로 선수답게 긴 겨울 열심히 준비했을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승자가 있으면 패자도 있는 법. 누군가는 열심히 노력했어도 패배의 쓴 맛을 봐야만 한다. 매번 이길 수 없는 것이 스포츠의 법칙이다. 하지만 연패의 늪에 빠져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아무리 시즌 초반일지라도 연패는 팀의 사기를 꺾고 관중의 한숨을 깊게 한다. 그리고 서른 경기즈음 진행됐을 무렵 사람들은 숨겨둔 감정을 표출하며 그동안의 경기를 평가한다.


“거액의 돈을 주고 영입한 선수 맞아?”

“예전 그 외국인 선수가 더 나아 보이는데, 스카우트가 잘못된 것 아니냐” 등의 이야기를 하며.


냉정한 평가와 더불어 미래도 예측하기 시작한다. 가을야구는커녕 하위권으로 추락하는 거 아니냐는 걱정 어린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하지만 144경기 중 아직 30경기를 했을 뿐이다. 그러니 아직 팀의 승률을 논하며 앞으로를 전망하긴 이르다. 내가 응원하는 팀 역시 초반 성적이 좋지 않았다. 팀 전체적으로 타격 부진이 길어졌다. 타선의 절실한 지원이 필요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기대가 실망으로 조금씩 바뀌어 갈 무렵. 역대급 인생 경기를 관람했다. ‘이렇게 한꺼번에 잘하기 없기.’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타선은 폭발했고 불펜 또한 탄탄히 제 역학을 다했다. 어제까지 절절매던 그 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수비, 공격 모두 완벽했다.

고인이 된 야구 해설가 하일성 님의 말처럼 “야구는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야구 경기처럼 우리 인생도 어떻게 펼쳐질 지 아무도 모른다. 행복한 일로 가득 채워질 수도 있고 불행의 늪에 연속적으로 빠질 수도 있다. 야구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 몽테뉴가 ‘수상록’에서 전한 문장이 생각났다.


우리는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지 못하고 언제나 그 너머를 향해 있다.
두려움과 욕망 그리고 기대는 우리를 미래로 내던져 앞날을 그려보는 즐거움을 앗아가고 미처 깨닫기도 전에 현재의 시간을 흘려보내게 만든다.
미래에 대해 근심하는 영혼은 불행하다.




몽테뉴는 누구인가.


미셸 에켐 드 몽테뉴 (Michel Eyquem de Montaigne)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필가이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한 후, 법관으로 살았다. 1571년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때 집필한 책이 1580년 산문집으로 출간된 [수상록]이다. 그는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바람직한 삶과 가치에 대해 논했다. 간결한 문장으로 전하고자 노력한 덕에 수상록은 어렵지 않게 읽히는 철학책이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내 책은 나 자신이다'는 그의 말은 나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예쁜 단어들을 조합해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좀 더 다양한 몽테뉴의 저술을 읽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수상록은 그가 저술한 유일한 저서다. 에세이 형태의 철학 책으로 마음이 불편하거나 누군가에게 철학책을 선물하고 싶을 때 몽테뉴의 수상록이 생각난다. 삶과 죽음, 우정을 비롯한 인간 관계에 대해 성찰할 수 있어 문장을 읽고 의미를 생각하기에 좋다. 위에서 전한 몽테뉴의 문장은 미래를 불안해말고 현재에 충실할 것을 강조한다. 그것이 주어진 삶을 의미있게 살아가는 방법이라 전한다. 조금 철학적 하루를 보내고 싶다면 [수상록]을 읽어보길 권한다.




지금, 이순간 행복합시다


경기가 종료되면 오늘의 MVP를 뽑고 인터뷰를 한다. 경기는 끝났지만 인터뷰까지 봐야 오늘의 야구 관람은 종료된다. 선수가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야구 안에 인생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야구는 분명 철학적 스포츠다. 그게 야구의 매력이다. 좋아하는 팀에 유독 눈길이 가는 선수가 한 명 있다. 처음에는 야구선수가 된 인생 서사가 평범하지 않아 눈길이 갔는데, 지금은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 때문에 응원하고 있다. 그가 선발 명단에 있었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잘했으면 좋겠다. 배트를 들고 공격할 때면 마음속으로 안타를 외치고 글러브를 착용하고 수비할 때면 미친 수비를 보여주길 바란다. 늦은 나이에 프로에 입단했고 여러 인생의 고비가 있었지만 야구를 포기하지 않은 그의 끈기를 높이 평가했기에 좋은 경기를 보여주길 바라고 있다. 노력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다. 꾸준한 노력 끝에 결국 좋은 수비와 결정적 안타로 팀을 승리로 이끈 그는 오늘의 MVP로 뽑혔다. 그는 감격에 가득 차 있는 듯 했으나 침착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그가 건넨 말 중 “야구를 할 수 있어 행복해요.”라는 말은 나를 오랫동안 미소 짓게 했다.


야구를 좋아하기 시작한 이후, 내가 응원하는 팀은 가을야구(포스트시즌)에 딱 한 번 진출했다. 그 외에는 늘 하위권에 머물렀다. 연패의 늪에 빠진 적도 많으며 오늘은 이겼구나 싶을 때면 9회에서 아쉽게 패배한 적도 많다. 이래저래 운도 따라 주지 않았으며 매번 부진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마음으로 경우의 수를 계산하며 매년 가을야구(포스트시즌) 진출을 염원했다. 그러다 시즌 막바지 무렵, 가을야구(포스트시즌)에 좌절되었음을 받아들일 때면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내년에 잘하면 되지’라는 비교적 넉넉한 마음으로 경기를 편하게 봤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경기를 보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던 선수의 재능이 보이고 가끔은 야구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했도 있었다.


경기에 집중하느라 나는 야구장이 이토록 매력적 장소인지 알지 못했다. 경기장에 갈 때면 승리에 목말라 경기를 보면서도 다른 팀의 경기까지 핸드폰으로 신경 쓰느라 바빴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편하게 경기를 보니 야구장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의 표정을 보게 됐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에서 야구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에게 인생의 기쁨을 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응원가를 따라 부르는 해맑은 어린이의 미소, 가족단위 관중들의 행복한 표정, 맥주 한잔 마시며 혼자 야구를 보는 할아버지의 여유로움까지. 모두 야구를 보는 시간만큼은 세상 근심을 잊은 얼굴이었다. 다양한 우리의 모습과 어우러진 야구장의 모습이 참 예뻤다.

지금 여기에서 나도 함께 야구를 볼 수 있어 좋았다.


경기에 대한 승패가 중요하지 않은 시기는 그동안 등판하지 못했던 선수에게 좋은 기회다. 자신에게 주어진 황금 같은 이 기회에 무언가를 보여주고자 최선을 다하는 선수의 모습을 보면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몽테뉴의 말이 생각난다. 지금 여기에서 그동안 노력한 실력을 보여주려면 무엇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상황을 즐겨야 한다. 지나친 긴장은 실수를 낳고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때론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니 현재에 충실하려면 미래에 대한 불안과는 잠시 멀어지는 것이 좋다.


세상에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 오지랖 부려봤자 안 되는 일들이 꽤 많다. 그리고 걱정해도 일어날 일은 언젠가는 일어나고야 만다. 그러니 내 자리에서 묵묵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좋다.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내 인생에도 결정적 안타로 득점을 올리는 환희의 순간이 올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불행을 묵묵히 견딘다면 행운의 홈런을 칠 수 있는 기회도 찾아올 것이다. 몽테뉴의 말처럼 현재의 시간을 흘려보내지 말고, 미래에 대한 근심으로 불행해지지 말자.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상의 끈을 이어가다 보면 우리에게도 행복이 찾아올 것이다. 내게 주어진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살아갈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분명 올 것이다.


이전 01화9회 말 2 아웃, 니체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