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이 같은 어른,
어른 같은 아이.
1.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는 상처받은 아이들과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상처받은 어른들이 등장한다. 어른들은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미성숙한 태도로 아이들을 대하고, 그 때문에 아이들은 빨리 자라는 법을 터득한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은 또 서로를 아프게 하고, 보듬고, 사랑한다. 웨스 앤더슨은 매 작품에서 상처를 마주하고 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사랑'이 얼마나 복잡하고 또 완전한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라이즈 킹덤(2012)>은 웨스 앤더슨의 이런 가치관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2.
<문라이즈 킹덤(2012)>은 오합지졸 어른들을 제치고 사랑을 쟁취하는 십대 꼬꼬마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둘의 첫 만남, 들판에서의 접선, 그리고 그들의 '문라이즈 킹덤'에서 수지와 샘을 화면의 양 끝에 위치시킨다. 그 거리만큼이나 둘이 자라온 환경의 차이는 크다. 수지는 풍족한 가정에서 부모와 세 남동생에 둘러싸여 자란 반면 고아인 샘은 위탁 가정을 전전하다 청소년 스카우트 캠프에 버려졌다. 그렇지만 둘은 공통적으로 자신을 이해해줄 누군가를 절실하게 바란다.
그래서인지 수지와 샘은 첫 만남부터 서로를 알아본다. 첫 만남 장면은 놀랄만큼 감각적이다. 서로에게 눈을 못박은 채 흔들리지도 않고 툭, 툭 핑퐁처럼 짧은 몇 마디를 주고 받는다. 그 빠져들 것 같은 눈맞춤으로 둘은 첫눈에 반한다. 다만 둘의 사랑은 여느 수줍고 간질간질하고 애달픈 사랑과는 사뭇 다르다. 이들의 사랑은 이미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부끄러워하고 감출 것도 없다. 서로에게 빠졌다는 데 한치의 의심도 없이, 둘은 편지로 가출을 계획한다. 그렇게 각 섬의 끝과 끝에 떨어져 있는 샘과 수지는 모든 것들을 거슬러 서로를 만나러 간다.
수지와 샘은 딱 맞는 퍼즐같다. 라쿤 꼬리가 달린 모자를 쓰고 스카우트 지식을 뽐내는데 열성인 샘을 보고 수지는 괴짜라고 생각하는대신 '너 정말 야영 잘 하는구나'라고 칭찬한다. 샘 또한 수지가 짙은 화장을 하고 불편한 옷을 입는 것에 대해, 야영을 하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짐에 고양이까지 데리고 온 것에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Huh,' 하고 너는 그런 애구나, 그게 너구나, 하는 눈빛을 보낼 뿐이다. 둘은 관객이 보기에 너무나도 괴상한 그 모든 걸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넘긴다. 이상한 게 아니야. 그게 너인 거야, 하고.
둘이 얼마나 단순하고 서로를 좋아하냐면, 이런 대화가 있다.
Suzy
I always wished I was an orphan. (난 항상 내가 고아였으면 했어.)
Most of my favorite characters are. (멋진 캐릭터들은 다 그렇잖아.)
I think your lives are more special. (네 삶이 더 특별한 것 같아.)
Sam
I love you but you don't know what you're talking about. (난 널 사랑하지만 너 진짜 헛소리한다.)
Suzy
I love you too. (나도 사랑해.)
수지와 샘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수지는 차라리 부모가 없는 샘의 형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샘은 수지가 집안의 문제아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와 다르게 고생 없이 자라 얌전할 것 같은 수지가 문제아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렇더라도 미안해, 한마디에 둘은 다시 사이 좋은 커플이 된다. 서로가 뱉은 뾰족한 말보다 좋아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3.
이렇게 단순하고 솔직한 둘과 달리 영화 속 어른들은 감정을 숨기고 절차와 규율을 따진다. 수지의 부모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데도 서로를 속이며 결혼을 이어나가고, 사회복지사는 샘이 어떻게 되던 절차만 따르면 된다고 한다. 수지와 샘을 찾는 과정에서도 어른들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아이들이 왜 달아났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믿음직한 어른이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스스로가 어른이 된다. 샘과 수지는 스스로를 방어하고 자신들이 문제아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어른처럼 구는 법을 터득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아이들을 더 잔혹하고 불안정하게 만들 뿐이다. 사랑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절박해진다.
4.
결국 둘을 갈라놓으려는 어른들에게 쫓겨 수지와 샘은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 않고 첨탑 지붕 위로 도망친다. 이 장면에서 같이 있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둘의 태도는 허황되기보다 숭고하다. 이 시점에서 관객은 무엇이 이 아이들을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었나 생각하게 된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문라이즈 킹덤(2012)>을 통해 아이를 아이로 있을 수 있게 하는 것, 그게 어른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역설한다. 샤프 소장은 유일하게 샘과 수지를 이해하는 어른이다. 샤프 소장의 집에서 소장과 샘이 나누는 대화는 둘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Sharp
Look, let's face it. (자, 솔직히 말해보자.)
You're probably a much more intelligent person than I am. (너는 아마 나보다 훨씬 똑똑한 애겠지.)
(...)
All mankind makes mistakes. (인간은 다 실수를 해.)
It's our job to try to protect you from making the dangerous ones if we can. (할 수 있다면 너를 위험한 실수들로부터 보호하는게 어른들의 역할이란다.)
...You want some beer? (맥주 마실래?)
(...)
Sam
Did you love someone ever?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나요?)
Sharp
Yes I did. (있었지.)
Sam
What happened? (어떻게 됐는데요?)
Sharp
She didn't love me back. (그녀가 날 사랑하지 않았지.)
Sam
Ah. (아.)
Sharp
'Sorry for your loss,' anyway that's what you're supposed to say. ('유감이네요,' 어쨌든 그런 상황에선 이렇게 말하는 거란다.)
나는 이 대화를 정말 좋아한다. 샤프 소장은 샘을 어린애라고 깔보거나 샘의 판단을 무시하지 않고, 그저 ‘너무 위험한 실수는 하지 않도록’ 이끌어주려고 한다. 샘은 예의 그 말투로 짐짓 어른스럽게 말하지만, 샘도 결국 아이일 뿐이었고 이 아이에게는 많은 걸 알려줄 어른이 필요한 거였다는 게 이 대화에서 드러난다. 결국 수지와 샘의 사랑은 샤프 소장이 샘을 입양하게 되면서 이뤄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수지의 집은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는 공간이 아니라 수지와 샘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공간이 된다. 둘은 이제 어른들의 보호를 받으며 사랑할 수 있게 된다.
5.
웨스 앤더슨은 <문라이즈 킹덤(2012)>에서도 특유의 정면 인물샷과 카메라의 상하좌우 이동을 이용해 정교하게 계산된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든다. 특히 1965년이라는 시대 배경에 걸맞는 빈티지한 색감으로 하나의 동화책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문라이즈 킹덤(2012)>에서의 이런 스타일은 영화 속 이야기가 비현실적이라고 느끼게 만들고, 그래서 관객은 더욱 수지와 샘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다. 어른 아이와 미성숙한 어른, 사랑이라는 테마로 웨스 앤더슨은 상처받은 어른들을 위한 또 하나의 동화를 만들어낸다.
+) <문라이즈 킹덤(2012)>에서 색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간단히 정리하면 샘은 노란색, 수지는 붉은색이고, 화자인 수지가 샘과의 사랑을 통해 상처를 보듬게 된다는 게 영화의 핵심이다. 특히 줄곧 붉은색 옷을 입던 수지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노란색 옷을 입고, 한바탕 폭풍이 친 뒤에 옥수수가 풍년이었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수지가 극 중 아이들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준다는 점에서 빨간 옷을 입은 나레이터와의 연관성도 찾을 수 있다.
++) 수지의 엄마와 아빠가 자기 전 누워 천장을 보며 하는 대화가 있다. 군데군데 나오는 이런 부분들에서 웨스 앤더슨의, 어쩌면 모두의 트라우마와 아픔이 조금씩 드러난다. 다 아물어가는 상처의 반창고를 들춰보는 방식으로. 웨스 앤더슨 식의 들춰보기는 다정하다.
Walt
당신은 나 없으면 더 잘 살거야.
Laura
약한 모습 보이지 마.
Walt
왜?
Laura
애들 생각해서 살아야지.
Walt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