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어버린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여러 해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고향동생을 만난 일이 있었다. 당차고 말많고 항상 고양되어 있는, 정적인 성향의 나로서는 좀 부담되는 스타일의 녀석이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에 본 그녀는 불운한 환경과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기복으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어두운 녀석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어른이 되었다. 나름대로 꿈이 있어 학위도 밟았다. 사회로 나와서는 이를 악물고 살았고, 자신이 몸담은 곳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냈다. 그처럼 수 년을 새벽까지 일하며 버텨냈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은 독한 년이라는 이미지 뿐이었고, 끝내는 그곳에 만연한 부조리와 윗 사람의 불의함으로 빛을 내지 못했다.
결국 그 부조리와 불의를 가열차게 고발하여 관련자들을 수렁에 넣은 후, 그녀는 잠적하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접어놓은 꿈과 텅빈 통장잔고에 시달리다, 최근에서야 자신의 가게를 시작하며 간신히 안정을 찾은 모양이었다. 아직은 남의 가게 한켠에 더부살이하는 입장이지만, 조금씩 사입하는 물건들을 늘려가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소설에 있을만한 파란만장한 자신의 이야기를, 그녀는 빌보 배긴스의 신나는 모험담처럼 내 앞에 늘어놓았다. 그러다 잠시 이야기가 멎었고, 이윽고 그녀의 이야기는 대단원에 이르렀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무겁고 짙은 목소리였다.
"오빠, 그런 아아들 있제. 가마히만 있어도 사랑이 쏟아지는. 외모든, 성격이든. 근데 내는 이쁜 것도 아이고 뭐 사근사근한 것도 아이고, 그란 거 아무 것도 없었다 아이가. 그러니 그 아아들 틈에서 독한 년으로 버텨야 간신히 살아남기라도 했던기라."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 말이 오늘따라 가슴을 울린다. 가만히만 있어도 사랑이 쏟아지는 그런 사람들이 부조리를 피해갈 때, 가진 거라고는 남들보다 아주 조금 나은 실력에 독기 밖에 없었던 우리들.
그러나 이제는 부조리에 대항하던 그 독기조차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마침내 독기를 내뱉고 파국을 택할지, 내뱉지 못한 독기를 삼키다가 시름에 잠길지, 양자택일 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삶들. 그 말로는 어디런가. 독기로 시들어버린 들에도 봄은 오는가.
(표지사진) Julia Rudakova, <Person holding brown paper plane photo>, https://unsplash.com/photos/BF2t42VNgY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