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을 하고 약 한 달이 흐른 뒤, 드디어 첫 수업이 시작됐다. 수업장소가 집과는 조금 먼 거리에 있어서, 바이크로 30-40분을 달려 도착했다. 가정집이었고, 굉장히 무거운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귀여운 비글 세 마리가 쪼로로 달려와 낯선 사람인 나를 확인하고 안으로 들여보내줬다.
안으로 들어서니 로빈이 밝게 인사를 건넸다. 일찍 도착한 몇몇의 수강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적막이 흘렀다. 연기를 배우러 온 사람들일 테니 당연히 텐션들이 높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나 역시도 낯을 많이 가리고, 뭔가 선뜻 말 걸기는 어려워 그냥 잠자코 소파에 앉아있었다. 다섯 시가 되니 로빈이 안으로 들어가지고 했고 모두들 옆방으로 들어갔다. 옆방에는 마치 무용 연습실처럼 큰 거울이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고, 거울 앞으로 검은색 커튼이 쳐져 있었다. 어색한 공기는 그곳의 커튼처럼 계속 방안을 감쌌다.
로빈은 연기를 왜 배우고 싶은지 한 명씩 물었다. 나는 새로운 취미를 찾고 있고, 내 감정을 탐험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연관 업계 종사자들이 많았다. 한 명은 학교에서 연극반을 맡게 되어 왔다고 했다. 국적도 다양했다. 한국, 태국, 미얀마, 영국, 싱가포르, 남아공, 중국, 우크라이나, 러시아. 흥미로운 조합이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출신은 러시아어로 대화하기도 했다.
연기 코스는 총 세 단계였다. 첫 4주는 내면의 감정을 탐구하는 시간, 두 번째 4주는 스크립트를 읽고 연기하는 시간, 마지막 4주는 공연 준비 기간이었다.
짧은 소개가 끝나자 이름과 특정 소리, 몸짓을 함께 말하는 활동을 했다. 돌아가면서 큰 소리를 낸 뒤, 이름을 말할 때 몸짓을 추가했다. 예를 들어 "짠!" 하고 양팔을 올리며 "수리!"라고 외치면,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따라 했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소리 내며 뜬금없는 몸짓을 하는 게 뭔가 부끄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했다. 로빈은 서로 이름을 더 빨리 잘 외우기 위함과 더불어 첫 만남의 긴장을 깨기 위함이라고 했다. 확실히 이름도 잘 외워졌고, 분위기도 좀 풀렸다.
이어서 로빈은 종이와 크레파스를 나눠주었다. 초등학생 때 이후 약 20년 만에 보는 크레파스인 듯했다. 로빈은 종이를 나눠주면서 앞면에는 자기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 뒷면에는 남들이 보는 나의 모습을 그리라고 하고 15분 정도의 시간을 줬다.
최근 들어 그림을 그렸던 적이 있는가. 정말 오랜만에 크레파스를 써서 그림을 그려보았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을 먼저 그렸다. A4 용지에 반명함판 사진 마냥 얼굴과 상반신을 그렸다. 짧은 단발머리, 은은하게 짓고 있는 미소, 단정한 옷차림. 내가 아침에 출근 전 화장을 다하고 보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그려 보려 했다. 그리고 뒤면에는 일하고 있는 내 모습을 그렸다. 노트북 앞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모습, 워크숍을 진행하는 모습 등.
15분의 시간이 지나고 각자 그린 그림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아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람들은 자신을 꽃, 베트맨, 갇혀 있는 새 등과 같이 아주 비유적으로 자신을 그리고 설명했다. 싱가포르에서 온 바니는 남들이 생각하는 자신을 알록달록한 모습의 꽃으로 표현했다. 그녀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어떤 일이든 잘 도와주며 호의적이라고 본인을 설명했는데, 내면의 진짜 본인은 사실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내 옆에 우크라이나에서 온 아야 역시 본인을 새로 그렸는데 화려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이 남들에게 보여지지만 실제로 자신은 좀 더 초라한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사람들의 추상적이고 감성적인 설명들을 듣고 나니 내 그림을 설명하기 다소 민망했다.
내가 보는 내 모습은 매일 거울 속에서 마주하는 평범한 모습이었고, 남들이 보는 모습은 일을 하거나 워크숍에서 발표하며 앞에 서 있는 나였다. 나는 그림을 설명할 때 덧붙였다. 사실 나를 추상적이거나 비유적으로 표현할 생각은 못 했는데,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꽤 인상 깊었다고. 그러면서 나는 상상력이 부족한 것 같다고 했다. 초등학생 시절, 엄마가 창의력을 키워주겠다며 학습지며 학원에 온갖 돈을 쏟아부었던 게 미안할 정도로, 내 그림은 창의력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뭐, 대부분 수강생들이 예술 쪽에 종사하니 나보다 감수성이 풍부한 게 당연하지. 하고 체념해버렸다.
이후엔 명상이 이어졌다. 땅바닥에 누워서 로빈이 하는 말과 들려오는 음악을 들으면서 상상을 해보는 시간이 주어졌다. 시키는 대로 땅바닥에 누웠고, 마룻바닥의 찬기가 등에 닿았다. 로빈은,
"지금 우리는 푸른 잔디밭에 누워있습니다"
라고 했다. 아무리 푸른 잔디밭이라 생각하려 해도 등에서 느껴져 오는 찬 마룻바닥의 기운이 도저히 나를 풀밭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로빈은 이어서,
"산들바람이 불어옵니다. 바람을 느껴보세요"
라고 말했다. 나에게 산들바람은 없었다. 회전하며 스치는 에어컨 바람이 조금 불편하게 차가웠을 뿐.
로빈은 이어서 우리 몸이 점점 더 가벼워진다고 말했다. 무게가 차차 줄어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풀밭에서 몸이 떠지고, 공기 중으로 떠오르고, 그 가벼워진 몸이 어느새 하늘로 가서 구름을 스치고...
일단 그의 모든 말들을 듣고 있었으나, 나는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 딱딱한 바닥 위에서 몸이 떠오른다는 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단 말인가. 머릿속은 잡다한 여러 생각들로 가득했다.
약 10년 전, 호주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구름을 스쳤는데, 물방울이 모여 있다 보니 부드럽기는커녕 따갑게 느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구름이 부드럽다니, 로빈 말은 현실과 다르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현실로 생각이 튀었다. ‘나는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하지? 혹시 ADHD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곧이어 요리하다가, 집안일 하다가, 일하다가도 눈에 보이는 대로 이것저것 해치우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 결국 ‘그래, 나 ADHD 맞는 것 같아’라는 혼자만의 결론까지 내렸다. 이렇게 머릿속이 온갖 생각으로 분주한 사이, 로빈의 내레이션 속 나는 이미 몸이 더 가벼워져 우주에 도달해 있었다.
"우주에서 왔습니다. 우주에서 바라보는 당신의 행성 색깔은 어떤 색인가요?"
하고 말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당연히 파랑 혹은 초록이겠지. 그것이 지구의 색깔이니까라고 말했다.
로빈은,
"이제 달로 가봅시다, 달을 한 바퀴 돌아볼까요?"
나는 ‘달을 한 바퀴 도는 데 얼마나 걸릴까? 지구 크기의 6분의 1이라면…’ 하고 계산하며 딴 길로 새고 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로 가득했다. 로빈은 계속 부드럽고 감성적인 이야기를 던졌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경험과 논리로만 재단하느라 분주했다. 결국, 상상력 시간은 내게 실패로 끝나버렸다.
명상이 끝나고 로빈은 감상을 물었다. 중국계 독일인인 슈안은 말했다.
"제 행성은 노란색이었었요."
이어 아야는,
"제 행성은 보라색이었어요."
처음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세상이 날 두고 몰카를 하는 것인가 했다. 지구에 사는 나에게 행성은 너무나 당연히도 파랑, 혹은 초록만 생각했는데, 로빈이 말한 행성이 상상 속 행성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놀랐다.
거의 80-90퍼센트의 T감성을 가지고 있는 내 남편에게 난 불만이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감정적으로 공감을 해달라고, 이래서 늘 T들은 문제라고 F대변인 마냥 그를 로봇 취급했던 시간이 있었다. 나는 나름 풍부한 감수성을 지녔다 생각했었고, 사람들의 감정과 마음을 잘 읽는 편이라 생각했었다. 좋고 나쁨은 없겠지만, 나는 스스로가 F이길 선호했다. 따뜻함이 세상을 바꾸리라 하며 F호소인처럼 살아왔었다. (물론 T도 따뜻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수강생들을 보니 F를 넘어 대왕 F, 트리플 F들만 다 모아 논 것이 아닌가. 그들을 보며 연기를 하려면 저 정도의 감수성을 지녀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이라면, 아무래도 이 길은 내겐 틀렸겠구나 생각했다.
내면의 감정을 살펴보고 공유하는 활동들을 하니, 이게 연기수업이 맞는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약간 단체 심리상담 같은 느낌을 받았고 이게 어떻게 연기랑 이어진다는 건지, 연기는 도대체 언제 배운다는 건지 좀 감이 오진 않았다. 일단 첫날이니, 좀 더 기다려 보자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 채운채 연기 수업이 끝났다. 돌아오는 길에 내가 과연 연기를 할 수 있는 재질의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상상력이 없어서야, 이렇게 공감이 안되서야 어떻게 연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집에 와서 있었던 일을 친구 으니와 여동생에게 털어놓으니 둘 다 웃으며 재미있어했다. 여동생은 “나도 그림 그렇게 그릴 것 같은데? 거기 사람들이 더 특이한 거 아냐?”라고 해서, ‘아, 내가 이상한 건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으니는 “언니가 나무 1이나 행인 1을 맡게 되더라도 난 응원할 게!” 라며 북돋아줬고, 여동생도 “재능은 없을지 몰라도 감수성 없는 게 이상한 건 아니야”라며 이상한 위로를 건넸다.
남편도 있었던 일을 흥미롭게 들어줬고, 그 역시도 수강생들의 감상과 해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종의 문제인가, 국적의 문제, 자라온 환경의 문제인가 나는 남편과 이상한 추측들을 난무하며 첫날을 곱씹었다.
과연, 앞으로의 내 연기 일지가 과연 채워질 순 있을지, 상상력이 길러질 수 있을지, 3개월 뒤 무대에 설 순 있을지, 기대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