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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인 Sep 19. 2024

12. 아름다운 공간이 주는 행복

미니멀리즘도 좋지만......

물건과 공간에 대해 실용성, 간결함,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성격에 잘 맞을뿐더러 지구의 환경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이니 신념이 된 생활 습관은 점점 견고해져 갔다.


결국 마지막엔 쓰레기가 되고 말 물건들의 최후와 어딘가에 쌓여가고 있는 쓰레기 산이 떠올라 물건 구매는 점점 까다로워지고 꼭 필요한 물건인가의 기준은 엄격해졌다.


하지만,

내 몸이 노력하면 된다고, 숙면을 위한 암막커튼까지 꼭 필요한 물건에서 제외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미니멀리즘에 대해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에서 경험한 예쁜 숙소와 아름다운 소도시들은 강박으로 향할 위기에 몰린 내 미니멀리즘의 적정 선찾아주었다.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Ushuaia)에서 2박 숙박비를 날리 아침에 급히 예약해 찾아 간 새 숙소, 포사다 델 핀 델 문도(Posada del Fin del Mundo)!


숙소 상처가 깊은 데다, 당일 특가로 뜬 가격이 관광지 물가 대비 너무 저렴해 별 기대감이 없었. 부디 '청결'하기만 해 다오.....


택시에서 내려 올려다보니 키 큰 나무들과 함께 서 있는 하얀 3층짜리 건물에서 오랜 세월이 느껴지고 격자 창문들이 정감 있어 보인다.


실내로 들어서 리셉션, 복도, 휴게실, 테라스, 식당안내받으며 벽과 천장이 각기 코발트블루, 그린, 연빨강, 주황으로 칠해진 산뜻하고 아름다운 공간과 만난다. 원목 소파와 장식장, 테이블, 의자 위에는 아이보리나 연노랑, 주황색 등의 방석과 쿠션, 소품들이 잘 매치되어 있다.


크고 작은 각종 초록식물화분들은 곳곳에서 싱그러운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다.


벽에 걸려있는 오너의 가족사와 숙소 히스토리를 짐작케 하는 옛 사진과 그림, 책, 오래된 괘종시계, 자동차 번호판들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가구들은 오래되었고 계단은 오르내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예쁜 프로방스 풍 커튼과 침구류가 맞이하는 청결하고 정갈한 룸에 들어서니 긴장이 풀리고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내동댕이쳐졌던 우리 여행의 기품이 돌아왔다!


방랑자를 품어주는 따뜻하고 아늑한 집에 온 것 같다. 피로를 풀고 안식을 구할 공간이 넓고 호화로울 필요는 없지만 깨끗하고 아름다워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티티카카 호숫가 언덕배기에 위치한 볼리비아 코파카바나의 '라스 올라스(Hostal Las Olas)' 호스텔 단지 독특한 디자인의 펜션형 독채들과 잘 가꿔진 정원이 호수와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곳이다.


컨셉에 따라 집 모양이 제각기 다른 이곳의 숙소들은, 주황과 황토 컬러를 베이스로, 시원하고 강렬한 코발트블루를 포인트 색으로 입고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창문 디자인, 지붕과 외벽, 해먹과 의자 같은 소품마다 알록달록 예쁜 색들이 입혀져 있다.


숙소와 정원 사이로 작은 길과 계단을 오르내리다 탄성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디테일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어느 한 구석 호스트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방치된 곳이 없다.


해발 3,800미터에 위치한, 하늘과 맞닿아 있는듯한 아름다운 티티카카호수는 '라스 올라스' 조경예술의 일부이고, '라스 올라스'가 옆에 있어 호수는 더욱 아름답다.


장작난로 옆 의자에 앉아 노을 지는 티티카카호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창밖에 숙소에서 키우는 귀여운 야마 가족이 놀러 온다. 이곳은 작은 동화나라 왕국이다.





에콰도르 키토의 키토 테라세(Hostal Quito Terrace)는 여행자를 감동시키는 선물 같은 곳이다.


대로변으로 난 좁은 입구로 들어서 리셉션으로 올라갈 때까지 잠시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다정하고 품위 있는 한국인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며 체크인을 하고 리셉션에서 옥상 룸으로 가는 동안 보게 되는 어메이징 한 공간 인테리어에 이내 눈이 휘둥그레진다. 벽과 천장, 구석구석 실내 공간을 채운 초록식물들, 마침내 마주 한 옥상 정원에 찬탄하느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옥상에는 룸과 공용 주방, 앉아 있으면 신선이 따로 없는 휴게 공간과 정원, 벤치들이 있다. 다양한 종류의 크고 작은 식물들이 각기 크기와 색깔, 모양에 따라 공간의 기능과 분위기에 어울리게 배치되어 있다.


옥상정원을 설계한 사장님의 섬세한 손길과 마음이 전해져 온다. 진심과 정성, 감각과 재능이 만들어 내는 디테일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리뷰 사진을 보고 왔는데, 실제가 훨씬 더 훌륭하다.


다가올 일에 대해 품고 있는 기대수준이 높을수록 실망이 크고, 맞닥뜨린 현실에서 얻는 만족감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형성된 기대감이 있다면 의식적으로 억누르려는 슬기로운 노력도 필요하다. 그런데, 기대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감동까지 선사하는, 그 어려운 일을 '키토 테라세'가 해냈다.


쿠엥카부터 다시 시작된 고산 증세가 2,850미터 키토에 오니 더욱 악화될 조짐을 보이는 중이었다. 으슬으슬한 몸이 기침을 시작하고 더부룩한 위와 장이 소화불량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난로가 있고, 온수 콸콸 잘 나오고, 청결하고 포근한 침구가 있는 룸에서 숙면하며 충분히 휴식을 취하니 고산증의 불씨가 사그라들었다.


대낮에도 마음 편히 활보할 수 없는 위험한 도시,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서 '키토 테라세'는 안전한 성 같은 숙소였다. 긴장하고 경계하느라 몸과 마음이 잔뜩 오그라들었던 여행자는 숙소에 돌아와 초록식물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옥상정원에서 안도와 평화의 에너지를 얻는다.


주방에서 간단히 아침 해 먹고, 옥상 정원 벤치에 앉아 호스탈에서 운영하는 2층 카페에서 사 온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특히 스스로에게 주는 귀한 선물 같았다.


호스탈에서 호텔급 품격을 누리며 스스로를 잘 대접하고 존중하는 느낌으로 행복했다.




그림 같은 호수와 아름다운 유럽풍 가옥, 초콜릿과 아이스크림 상점, 알록달록한 아웃도어 용품점들이 늘어선 남미의 스위스라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바릴로체(Bariloche), 하얀 도시 볼리비아 수크레(Sucre), 에콰도르 쿠엥카(Cuenca), 콜롬비아 살렌토(Salento)는 여행 중 만난 예쁜 소도시들이다.


'생필품이 아닌 것', 예쁜 쓰레기과의 물건들이 한껏 치장하고 진열되어 있는 고풍스러운 소도시의 골목길들이 마음을 말랑하게 만들고 감성을 파고든다. '아닌 줄 알았는데, 내가 이런 곳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




예쁜 숙소와 아름다운 소도시를 경험하며 공간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선명하게 느꼈다. 오랫동안 나서지 못하고 '기능과 실용' 뒤에 서 있던 '아름다움'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름답고 예쁜 것'들이 주는 에너지가 얼마나 밝고 기분좋은 것인지, 중요한지, 삶에 필요한지!




여행에서 돌아와 드라이한 침실을 뒤집었다. 암막커튼을 설치하고 예쁜 새 이불을 사고 협탁 위에 터치할 때마다 색깔이 바뀌는 앙증맞은 조명 볼을 올려놓았다. 수면의 질이 좋아졌고 분위기가 한결 안락해졌다. 그동안 참 답답하게 살았구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지만 자신의 기호, 취향, 편리와 충분히 상의하고 흔쾌히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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