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코파카바나에서 페루의 쿠스코(Cusco)로 가는 도중 푸노(Puno)를 경유하게 되었다.
예매한 야간 버스 승차 시간까지 6시간이 남아 시내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한다.
국경 넘어 도착한 페루의 첫 도시 푸노에서 간절하게 ‘아는 음식’이 먹고 싶다. 터미널에서 말을 튼 우로스 섬 투어 호객꾼에게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를 파는 식당이 있냐고 물으니 곧바로 택시기사에게 데려간다.
택시는 2층짜리 현대식 대형 건물 앞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1층엔 대형마트가 있고 2층으로 올라가니 영화관과 쇼핑몰, 푸드 코트가 있다. 푸드 코트에는 페루 프랜차이즈 햄버거를 비롯해 KFC와 여러 패스트푸드점들이 입점해 있다. 얼마만인가! 아르헨티나 살타(Salta)에서 마지막으로 대형마트를 이용한 후 한 달 만에 접하는 도시, 현대화된 쇼핑몰의 상업시스템이다.
음식 주문 방식, 테이블과 의자, 매장 분위기가 오랜만에 만난 혈육처럼 눈물 나게 반갑다. KFC 치킨과 코카콜라,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니 세상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하다. 흥정과 팁이 필요 없는 정가제, 익숙한 식당 시스템에 긴장이 풀린다. 저녁시간 대 푸드 코트를 꽉 채운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두드러지지 않는 익명의 편안함과 자유를 느낀다.
아르헨티나 북부의 작은 마을과 남미의 최빈국 볼리비아를 거치면서 고산증세, 비포장 도로, 흙먼지, 매연, 입맛에 맞지 않는 짠 음식, 대부분 흥정이 필요한 상거래 스트레스에 심신이 지쳐 있었다.
특히, 흥정은 우리에게 있어 재미가 아니라 에너지가 추가로 소모되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눈치, 순발력, 인내심, 배짱과 같은 흥정의 자질 중에 어느 것 하나 충분히 갖춘 게 없으니 항상 곤혹스럽게 넘어야 하는 허들인 것이다.
재래시장에 값싸고 싱싱한 과일이 많다지만 흥정도 스페인어도 못하는 어수룩한 여행자는 몇 번 바가지를 쓰고 나서 대형마트 지상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시원하고 청결한 매장에서 소매치기 근심 없이 마음껏 둘러보며 비교해 고른 정가의 물건들을 계산대에 올려놓고 무심히 서서, 띠익~ 직원이 바코드 찍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에 잔잔한 평화가 찾아온다.
딱히 할 것 없던, 도시도 숙소도 마음 가지 않던 페루의 치클라요(Chiclayo)와 콜롬비아 깔리(Cali)에서 대형 쇼핑몰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스타벅스, KFC, 버거킹, 맥도널드, 대형마트, 쇼핑몰은 여행의 휴식 공간이 되어준다. 여행 인프라가 열악한 남미에서 정가제의 선명함, 표준화된 시스템의 예측 가능함이 주는 신뢰, 청결, 에어컨, 와이파이를 제공하는 거대 미국 프랜차이즈 자본에 대한 호감마저 생겨난다.
하지만,
페루 치클라요에서, 개똥과 쓰레기들이 널려있고 드물게 심긴 나무마저 뿌옇게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가의 지붕만 간신히 얹은 허름한 집들을 지나쳐 쇼핑몰로 들어서는 마음 한편이 편치 않았다.
도시의 가난과 쇼핑몰 사이 괴리가 크게 느껴진다. 감수성 예민한 이 도시의 가난한 동네 아이들은 쇼핑몰에 와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는 각자의 기준으로 가질 가망 없는 물건과 부를 욕망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무턱대고 부와 물욕을 부정하기도, 저 포도는 어차피 신 포도일 거야 라며 돌아서는 배고픈 여우가 되기도, 다 부질없다는 깨달음에 이르기도 하겠지. 이런저런 방어기제를 사용하며 애쓰며 살아온 자신에게도 문득 연민이 솟는다.
현대식 숙소에 묵으며 마트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고, 마땅한 메뉴가 없으면 패스트푸드점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느릿느릿 공원과 미술관을 어슬렁거리는 도시 수혈을 마치고 나면, 건물과 사람이 싫증 나기 시작한다. 몸을 비틀며 고요한 자연을 그리워한다. 도시를 떠날 때가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