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어 하는 여행, 그 홀가분함과 불편함에 대하여

by 설인

버스를 타고 페루에서 에콰도르 국경을 넘기로 했다.


페루 치클라요(Chiclayo)에서 저녁 5시 30분 출발하여 에콰도르 쿠엥카(Cuenca)에 아침 6시경 도착하는 버스다. 앞 유리 통창으로 탁 트인 전망을 볼 수 있는 2층 왼쪽 맨 앞자리를 예매했다. 160도 정도 눕혀지는 세미카마(semi-cama) 좌석이다.


버스는 이 마을 저 마을 들르며 분주히 사람들을 태우고 내려놓는다.


현지 승객들은 버스 안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 따위는 배운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들 같다. 휴대폰 볼륨을 높여 뉴스와 드라마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들, 이 사람 저 사람과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들... 거리낌 없이 방출하는 각각의 소음들이 공기 중에 서로 부딪치고 엉키면서 버스 안은 밤늦게까지 정신없이 시끄럽다.


그들끼리는 서로 아무 불만이 없어 보이니 외국인인 우리가 적응해야 한다.


스페인어를 못 알아들어서 다행이다. 2시간 넘게 스피커폰을 켠 채 연인과 통화하는 뒷좌석 남자의 연애 사까지 속속들이 알게 될 뻔했다.


언제쯤 국경에 도착하려나 틈틈이 맵을 확인 하며 소음 속에서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다 보니, 시간이 어느덧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갑자기, 버스가 만코라(Mancora)라는 동네에 멈춰 섰다.


커튼을 들추고 창밖을 살피니 도로 옆에 경찰서 건물이 보인다. 경찰들이 버스를 세운 모양이다. 그들이 버스 안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리고 1층의 소란함이 느껴진다. 무슨 일일까?


영문을 모른 채 멍하니 있는데 2층으로 올라온 경찰이 다가와 여권을 보여 달라고 한다. 그는 건네준 여권을 잠시 훑어보더니 우리 보고 버스에서 내리라 한다!


그동안 도시 간, 국가 간 이동으로 장거리 야간버스를 여러 번 탔지만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일이다.


순간, 중남미 경찰에 관해 주어 들었던 별의별 흉악한 사례들이 다 떠오르기 시작한다. 경찰들이 검문한다고 야간버스를 세우고는 강도로 돌변해 승객들을 총기로 위협하고 귀중품을 탈탈 털어갔다는 경험담을 읽은 적도 있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종류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버스에서 내리면 혹시 짐을 뒤질 것에 대비해 현금을 모두 챙겨서 내려갔다. 전개될 몇 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하며 경찰서로 걸음을 옮기는데, 이상하리만치 긴장도 걱정도 되지 않는다. 이 여유는 어디서 온 것일까?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도 두려울 것이 없다.


아이들은 이미 부모의 돌봄이 필요한 시기를 지나 자신의 삶을 기획할 줄 아는 성인이 되었고,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적은 나는, 죽음을 자주 의식하며 어떻게 살다 죽을 것인가에 대한 사유가 깊어지는 나이에 도달했다. 여행지에서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다니는 여행이다.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니 버스에서 내린 사람은 외국인 여행객인 우리가 유일했다.


경찰관은 우리를 복도에 세워놓고 휴대폰에 뭔가를 골똘히 입력한다. 열나절 누르고 나서 보여준 번역기에는 ‘너희 여권에 페루 입국 도장이 없다’라고 쓰여 있다.


“아니, 무슨 얘기? 페루 요즘 입국 스탬프 안 찍어주잖아. 노 스탬프! 당신들이 바뀐 거 아직 모르는 것 같은데 다른 데 전화해서 확인해 봐.”


우리 여행에서 검색과 정보 담당을 맡은 내가 시작하고 남편이 무작정 거들며 둘이 아주 당당하게 영어, 한국어, 바디 랭귀지로 어필했다.


경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우리에게 수갑 채우는 시늉을 한다.


돈을 쥐어줘야 하나? 아니,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끝까지 가보자!


양 손목을 맞대고 거듭 수갑 찬 모습만 재연하는 경찰관의 심기를 살펴가며 강약을 조절하고, 호소와 주장 사이를 오가면서, 머릿속으로는 이럴 때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지 궁리해 본다.


그런데... 잠깐! 우리가 페루 어디로 입국했더라?


볼리비아 코파카바나에서 버스를 타고 푸노로 들어왔다. 버스에서 내려 입국 심사를 하고 여권에 스탬프를 받았다! 스탬프가 잘 찍혔는지 버스 차장이 일일이 한 명씩 여권을 확인하고 승객들을 버스에 태웠었는데...... 아... 내팽개쳐진 나의 기억!


여권 페이지를 넘겨보니, 당연히 찍혀있다!


바보들이 따로 없다. 경찰이 안 찍혀있다고 말하니 우리의 뇌는 안 찍혔다는 것을 기본 값으로 설정해 버렸다. 여권을 펼쳐 사실 여부를 확인할 생각도 안 하고 입국했던 기억을 되짚어보지도 않았다. 가장 먼저 체크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안 찍혔다는 말에 휘둘린 생각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리의 뇌는 도대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취약하고 못 믿을 것이 기억이고 판단이구나...


또한, 이 사태는 정보 과잉이 낳은 부작용이기도 하다. 최근에 이민청 규정이 변경되어 페루 출입국 과정에서 스탬프 날인이 생략된다는 기사를 읽었던 것이다. 머릿속에 뒤죽박죽으로 입력되어 있던 수많은 여행 정보 가운데, 순간 하필이면 그 기사가 생각난 것이다.


버스 안의 소음에 심신이 지쳐가다 겨우 잠들락 말락 하던 몽롱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라 뇌의 오작동이 일어났다고 변명해 본다. 하지만 나이 먹어서 그렇겠다는 생각도 배제하지 못한다.


경찰관들에게 입국 스탬프가 찍힌 페이지를 보여주니 밖에 있던 다른 경찰까지 들어와 스탬프를 함께 들여다본다. 그리고 자기네들끼리 잠시 속닥속닥 하더니 슬그머니 여권을 내준다.


행여나 뭔 트집을 또 잡을까 싶어 얼른 여권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와, 그때까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버스를 향해 뛰어갔다. 곧장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운전기사가 구세주 같았다.


볼리비아 비자 옆 페이지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페루 입국 스탬프를 정말 그들이 못 보았던 것일까? 한두 번 해보는 일도 아닐 텐데 말이다. 만일, 처음부터 여기 찍혀있지 않냐며 보여주었더라면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의문투성이지만 무사히 잘 해결되었음에 감사할 뿐이다.




나이 먹어 여행하니,


- 어깨에 얹혀있던 책임과 의무를 내려놓을 수 있는 시기가 되어,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주위에 미치는 나의 영향력이 크지 않으니 한결 홀가분하게 다닐 수 있다.


- 살면서 쌓인 세상사와 사람에 대한 경험치가 크고 작은 여행의 돌발 상황에 담대하게 대처하도록 내공을 발휘한다. 불가항력이면 흘러가는 대로 두면 되고, 그리 불안해할 것도 겁먹을 것도 없음을!


- 보통 사람 마음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알게 되니 경계심을 덜어내고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 말을 걸고 도움을 청한다. 이러저러한 자잘한 근심 속에서 유한한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 인간에 대한 연민! 이심전심으로 느끼는 비슷한 연령대를 만나면 마음이 더더욱 활짝 열린다.


- 은퇴해서 매여 있는 데가 없는 몸이라 시간부자가 되었다. 시간은 여행의 변수를 해결해 주고 일정을 유연하게 해 주며 여유라는 산소를 공급해 준다. 시간으로 체력을 비축하고 돈을 절약할 수 있다.


하지만,


- 체력이 달린다. 도시 간 지역 간 이동 후에는 푹 쉬면서 몸이 회복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루 일정은 대부분 짧게 잡고 오전 느지막이 나가서 해 지기 전에 들어온다. 마음에 드는 도시에서 길게 머물며 싱싱한 야채를 사다 직접 밥을 해 먹고 혈관 관리를 해야 한다.


- 밤 문화에 흥미가 떨어진다. 체력이 안 받쳐주니 밤까지 돌아다니는 게 무리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여행지가 밤에 위험하다니 나갈 엄두도 나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밤 문화가 그리 궁금하지 않다.


- 노안이 심해지고 기억력이 약화되어 불편한 일이 많다. 기억하고 체크해야 할 숫자들로 가득한 여행의 하루! 숙박비, 버스비, 투어비, 물건 값, 버스시간, 입장시간, 환율 등등... 기억력에 확신이 없으니 메모는 필수이고 필요한 순간 민첩하게 꺼내 활용해야 하는데, 순조롭게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어쩔 수 없다, 나이도 불편함도 순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