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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인 Aug 09. 2024

10. 시니어의 품격

나이 들어 갈수록, 자신과 더불어 주변의 길고 짧은 다채로운 인연들과 잘 지내며 익어가야 할 것이다. 성찰과 사유, 배움과 실행으로 다져진 품성이 은은한 향기로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하고 내 삶을 충만하게 해야 할 텐데......    


여행 중에 매우 인상적인 시니어들을 만났다.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분들이다.  

   



<유능하게 온화하게>


미국 LA공항에서 예약한 호텔의 셔틀버스 승차장을 찾지 못해 공항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얼굴에 주름이 깊은 지긋한 연세의 할머니 직원 분에게 호텔이름과 주소를 보여드리니 본인들이 갖고 있는 목록과 대조해 보고는 그런 호텔이 없다고 한다. 숙박앱에 공항에서 호텔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고 분명히 적혀있는데 말이다. 웬일인지 호텔과 전화연결도 되지 않아, 이후 우리는 예약이 잘못되었을까 봐 불안한 마음으로 3~40분 가까이 그분에게만 의지해야 했다.


마침내 호텔 이름에 착오가 있다는 것을 찾아내어 해당 셔틀버스 승차장 위치로 이동할 수 있게 안내해 주셨다.


어느 부분에서 일이 꼬인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아마도 80세를 훌쩍 넘긴 듯한 연세에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동료직원에게 자료를 요청하고 몇 군데 호텔에 전화를 걸어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가는 모습이 놀라웠다. 반드시 해결해 주겠다는 의지를 활활 불태우며 민첩하고 야무지게 일하면서도 틈틈이 온화한 미소와 응대로 당황한 우리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분으로 인해 비 오는 LA가 참으로 다정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담당 업무라고, 평생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고 해서 모두가 유능하지는 않다. 모든 담당자가 책임감 있고 헌신적인 것도 아니다. 스스로의 가치 기준과 인간에 대한 애정, 연민이 친절의 품을 넓힌다. 연륜으로 더욱 숙성된 온화함으로 유능하게 일하는 시니어, 멋지다!     




<너무 속되거나 쩨쩨하지 않게>


페루 우루밤바(Urubamba) 숙소를 체크아웃하면서 기분이 언짢았다. USD 기준으로 예약했는데 페루 SOL 현금으로 지불한 숙박비가 환산된 예약금액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다. 세금이나 이유가 될 수 있을만한 다른 요인들을 다 고려한다 해도 말이다. 춥다고 해서 가져다준 히터 사용 금액을 받은 것일까? 그런 경우는 없었는데...... 그렇다 해도 액수가 크다.


계산할 때 속 시원하게 물어볼 걸 그랬다. 머무는 동안 아주머니가 친절했으므로 말랑말랑해진 상태였다. 의아한 마음을 누르고 얼떨결에 지불하고 나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쾌해진다. 하... 큰돈은 아니지만 눈 뜨고 뻔히 치졸한 바가지에 넘어간 바보가 되었다는 자괴감이 든다. 숫자 기억에 극단적으로 취약한 주제에 대충 해 본 셈을 메모조차 안 해놓으니 즉각 대항할 근거도 자기 확신도 없는 것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우루밤바에서 콜렉티보를 타고 잉카시대의 골목길이 현존하는 마을,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로 갔다. 조용한 주택가 끝에 위치한 2층짜리 숙소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키가 큰 은발의 호스트가 맞아준다.

     

다시는 당하지 않으리! 한나절 밖에 안 지난, 아침의 불쾌감이 펄펄 끓고 있었으므로 야무지게 메모지와 볼펜을 꺼낸다. 현금으로 할 경우와 신용카드로 할 경우, SOL일 경우와 USD일 경우의 숙박비, 세금 포함여부 등을 차례로 묻고 메모한 후 비교하여 결제 방법을 선택할 생각이다. 이제부터 심기일전하여 치밀한 여행자로 거듭날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을 한다. 그러자 호스트가 무심한 표정으로 현금과 카드 the same price라고 하며 세금은 별도니 뭐니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조용히 결재를 기다리며 서있다. 숙박비 한두 푼 차이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곧바로 투지를 잃고 무안해져 카드를 건네니, 뭘 자세히 확인하거나 컴퓨터 숙박시스템 정보와 대조하는 절차 없이 우리가 준비해 간 부킹닷컴 예약 캡쳐본만 보고 카드를 긁는다. 그리고 서둘러 일어나 집 안 곳곳을 안내해 준다. 이 분은 자신이 공들인 숙소를 자부심을 가지고 게스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즐거운 사람이었다.     


독일 출신의 이 호스트는 자전거로 남미를 여행하던 중, 원주민 아내를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하고 늦은 나이에 결혼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로맨스를 들려주는 그의 상기된 얼굴이 소년 같다. 예술적 재능이 풍부한 부인이 만든 잉카 전통의상과 인형, 소품, 각종 수집품으로 장식된 숙소는 작은 잉카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널찍한 방과 안락한 초대형 침대, 이층까지 올려다 주는 정갈한 조식, 넓은 창문으로 보이는 안데스 산 전망에 가성비까지 좋은 숙소를 누릴 수 있었던 건 쪼잔하지 않은 호스트 덕분이다. 아등바등하지 않고 돈보다 우위로 둔 가치들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이 품격 있어 보인다. 너무 속되지 않게 순수함과 낭만을 유지하고 있는 은발의 로맨스 가이, 멋지다.     




<섬세하고 따뜻하게 본질로만>  

   

볼리비아 코파카바나의 아름다운 숙소 라스 올라스(Hostal Las Olas)에는 따뜻한 온기와 낭만, 군고구마를 선물해 주는 장작난로가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 첫 날밤 남편이 불을 지피기 위해 장작을 맨손으로 잡았다가 날카로운 장작 가시가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관통하는 사고가 났다.   

  

머리끈으로 손가락을 묶어 지혈하고 정신없이 리셉션으로 뛰어가 벨을 누르자 오너, 마틴이 나왔다. 그가 택시를 불렀고 병원 응급실에 동행했다.


가시가 손가락을 뚫고 나온 끔찍한 광경에 놀란 데다 당직의사와 간호사들이 우왕좌왕하며 시간을 지체하자 못 빼는가 싶어 겁이 나 펑펑 울었다.  

   

결국 마취를 한 후, 가시가 들어간 입구 부위를 절제해서 가시를 뽑고 꿰맸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이 진행되는 동안 마틴은 제정신이 아닌 나와 누워있는 남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비슷한 경험을 들려주며 안심시키려 애썼다. 의사와 소통하며 진행되는 상황을 바로 통역해 주었다. 어떻게 내 마음을 헤아렸는지 병원비는 많이 안 나올 거라고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일러준다. 남편은 뇌경색 이력으로 장기여행자보험 가입이 불가하여 보험 없이 여행 중이다. 보험도 없이 외국에서 응급실이라니. 전혀 가늠할 수 없는 병원비 공포에 휩싸여 있던 터였다. 그의 말대로 병원비는 약값 포함해서 우리 돈 2만 원도 안되게 나왔다. 볼리비아에 대한 사랑이 마구 샘솟는다.      


그가 대기시킨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니 방이 아주 따뜻하다. 그의 지시로 직원이 들어와 미리 난로를 피워놓은 것이다. 항생제와 염증치료제 복용법을 더블체크해 주고 나서야 방을 나서는 마틴!

  

본인이 운영하는 숙소에서 사고가 났으니 마음의 짐이 있겠으나 그분의 눈빛과 말, 태도에서는 그 이상의 것이 읽힌다. 진심 어린 다정한 걱정, 무엇이든 돕고자 하는 헌신, 가장 경이로운 감동을 준 것은 주의를 기울여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그의 섬세함이다. 생색을 내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의 선의마저 부담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빛이 역력하다. 이렇게 또 나는 ‘독일남자들이 참 세심하고 젠틀하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를 갖게 된다.

마틴은 독일 출신으로 젊은 시절 이곳 코파카바나로 이주해서 티티카카호숫가에 펜션형 독채 숙소단지를 일구기 시작했다고 한다. 초창기에 일했던 사람들과 여전히 함께 일하며 숙소를 꾸준히 확장해 가고 있다. 바로 옆 라 쿠풀라(Hostal La Cupula)까지 운영하는 규모가 큰 숙소 단지의 오너인데, 그는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항상 작업복 차림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늘 분주한 모습이다.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도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외출했다 돌아오는 중이었다. 폼 나는 사장님 노릇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젊은 시절부터 만들어 온 동화나라 같은 자신의 일터에서 매일 정원을 가꾸고 숙소를 정비하고 땀 흘려 노동하며 여행객을 맞이하는 마틴의 노년의 삶은 숭고해 보인다. 자신과 타인에게 섬세하게,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본질만 남은 알맹이로 살고 있는 삶, 멋지다.     




<여행하는 시니어들>


20여 년 전 패키지여행으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갔을 때 단체버스를 타고 가다 창밖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배낭여행객 서양 할머니를 본 적이 있다. 민소매 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배낭을 메고 무더위에 페달을 구르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군살 없는 팔과 다리는 탄탄하고 건강해 보였다. 질끈 동여맨 머리에 캡모자를 쓰고 혼자서 유유히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이 어찌나 인상적인지 지금까지도 뇌리에 박혀있다. 이후 내 여행은 자유여행으로 바뀌었고 나이의 한계를 두지 않는 여행을 꿈꾸게 되었다.    

 

미국 대도시의 어마어마한 숙박비를 절감하기 위해 시카고에서는 호스텔에 묵었다.  숙소 시스템은 체계적이었고 시설도 깨끗했지만 긴 복도를 두 번 꺾어 지나야 나타나는 공용화장실 이용의 불편함이 마음을 다소 다운시켰다. 이런 데는 패기 있는 야생의 젊은 배낭여행객들이 오는 곳 아닌가 하는.    

 

아침에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니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식당 안은 활기가 넘쳤다. 주름 가득한 연세의 홀로 여행객 할아버지들도 있고 역시 비슷한 연령대의 할머니 여행객들도 있다. 돋보기를 쓰고, 혹은 안경을 이마에 걸치고 휴대폰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정보를 검색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몸도 정신도 날렵해 보인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내공이 쌓여야 드러날 수 있는 건강한 배낭여행자의 포스다. 무엇에 건 나이의 한계를 두지 말자 해놓고 잠시나마 숙소에 위축되었던 마음이 부끄러워진다.  

    

80세가 넘어서도 낯선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을 잃지 않고 건강한 두 다리로 자유롭고 거친 여행을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는 노년이다.  




<잃지 말아야 할 활기와 독립심>


연중 기후가 온화하고 치안이 좋아 북미 은퇴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멕시코 산미구엘데아옌데(San Miguel de Allende)에 머무는 동안 토요 시장(Saturday Organic Market)에 가보았다.


시장뿐만 아니라 근처 카페와 식당들이 실버세대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캐주얼한 밝은 색 옷차림을 한 80~90대 노인분들이 명랑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귀가 어두워 직원과 똑같은 대화를 여러 번 되풀이하며 구부정한 허리로 한참 동안 서서 유기농 초콜릿을 사는 노인들, 느릿느릿 쇼핑을 하는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젊은 가족과 함께 온 분은 눈에 띄지 않는다. 천천히 혼자서 장을 봐서 짐을 들고 걸어가신다.


고령임에도 밝고 활기찬  실버세대들에게서 나오는 독립적이고 품위 있는 에너지가 가득한 토요 시장이다.     


<함께 늙어가는 동반자와 마주 보며 자주 웃기>


시카고 근교 Starved Rock 주립공원을 방문하느라 머물렀던 Ottawa 마을의 작은 호텔, 복도를 지나던 중 방에서 흘러나오는 어느 노부부의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발길을 멈췄다. 나지막한 대화 중간마다 수시로 껄껄껄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고 미소가 지어지는 한편, 신기하기도 다. 세상사 뭐 하나 새로울 것 없는, 수십 년을 함께 산 노년의 부부가 마주 앉아 뭐가 그렇게 숨넘어가게 웃을 일이 있을까? 말년에 재혼한 커플이라면 가능할까?     


조식을 먹다가 예의 그 익숙한 웃음소리를 듣고 한눈에 그 부부임을 알았다. 백발의 부부는 식당에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별거 아닌 일에 웃는다. 먹거리와 음료들이 대부분 자판기에서 나오고 핫케이크를 직접 조리해서 먹는 무인 조식식당에서  뭘 떨어뜨리거나 깜박하는 실수가 생기면 그들은  기다렸다는듯이 서로 유머로 받아치며 함께 웃는다.


노화로 인해 빈번해지는 소소한 실수들을 배우자끼리 지적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유머로 전환시킨다는 건 어떤 경지에 이른 난이도 높은 테크닉이다. 따지고 판단하는 단계를 넘어 삶의 황혼기에 이르러, 이런들 저런들 무엇이든 순하게 유머로 포용할 수 있는 부부의 품성이 빛난다.      

  

그들처럼 나이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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