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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심장 Oct 24. 2024

저는 왜 그렇게 첫째에게 모질었을까요

선생님,

오늘은 저희 첫째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지금에 와 돌이켜 볼 때, 가장 많이 떠올리는 건 바로 제일 큰 아이니까요. 저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 특히 저희 아이들 사이에서도 유독 저와 많이 부딪히고 제가 많이 의지하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러한 아이입니다.




첫째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고양이에 대해,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밤거리에서 마주친 이 아이를 키우게 된 거였죠. 전혀 공부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마주한 아이는 저에게 미지의 세계이자 실수 투성이,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실 고양이가 이토록 오래 살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었으니까요.


아무 생각 없이 아이를 케어하다가 감기에 걸리는 통에 빨간색 감기약을 먹이고는 입가에 잔뜩 약을 묻힌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음이 터진 적도 있고, 아이를 들고는 바다로 이고 지고 놀러 간 적도 있고, 지금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목줄 안 하고 거리 데리고 다니기 등등... 참... 이제와 생각하면 우리 큰 애가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막 키웠죠'. 그러다가 아이를 거리에서 데려온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저는 이 아이를 포함, 다섯 모두를 혼자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환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혼자 벌어야 했고 혼자 케어해야 하는 상황에서 저는, 첫째에게 정말 많이 의지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제일 맏이라고는 하지만... 저 아이가 뭘 알겠어요. 쟤도 그저 어린 고양이였을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 큰 애는 동갑내기 둘째는 물론 매년 차례대로 철딱서니 없는 엄마가 덜컥 집어오는 동생들을 참 알뜰살뜰 잘도 챙겨 키워줬습니다.

매일매일 정신없이 출근했다가 정신없이 퇴근해서 들락거리는 저를 대신해 위험한 곳과 괜찮은 곳을 가려 가르쳐 주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준 건 큰 아이 었던 겁니다. 그러니 그 긴 세월 동안 흔히 말하는 안전사고 한 번 없이, 큰 병치레 없이 잘 키울 수 있었다는 걸 이제야 참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큰 애에게 저는 짜증도 많이 내고 화도 많이 냈습니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큰 애는 저한테 등짝도 많이 맞았죠. 저도 아이 성질에 속도 많이 끓였고요.

이제와 생각해 보면 정말 사람 아이처럼 대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선생님. 많이 의지했고 많이 하소연했고 때론 남편의 자리일 수도, 때론 큰 아들의 자리일 수도 있는 포지션에서 그 아이는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떡 주무르듯 온몸을 주물떡 대도 가만히 있는데... 유독 등 외에 다른 곳을 손도 못 대게 해서 내심 어휴, 매몰차다, 매몰차- 하곤 했었습니다. 덩치는 또 얼마나 큰지... 큰 애는 그냥 뭐랄까, 상남자였어요. 사내. 그냥 무뚝뚝한 큰 아들이요.


그런 아이가 어느 밤엔가 울던 저에게 슬쩍 다가와 몸을 기대어 주던 걸 지금까지도 간혹 떠올리곤 합니다. 혹은 둘이 몰래 빠져나와 드라이브를 했던 것도요. 다른 아이들은 집 밖을 나오는 것 자체를 퍽 두려워하는데, 큰 애는 유독 드라이브하는 걸 좋아했어요. 제가 차를 몰 때면 몸을 벌떡 일으켜 창 밖을 두리번거리고 보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어쩌면 그게 우리 애에게는 정신없이 바쁜 엄마를 두고 넷이나 되는 동생들을 챙기며 쌓였을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재작년 5월 초, 갑자기 아이가 시들.. 해졌다고 느꼈습니다. 원래 남자아이들은 중성화 수술 이후 신장 문제가 여자애들보단 있을 수 있고, 마침 신장이 좋지 않았던 아이인지라 별 것 아닌 그 정도 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급성신부전증이라는 판단을 받아 들고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고양이 평균 수명을 넘긴,  수면마취조차 주춤거리게 만드는 나이였습니다.


아이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빠르게 말라가고 힘이 빠져갔습니다. 지난주에는 뒷다리를 못 펴더니 이번주는 아예 일어나지를 못 했습니다.


화장실에 가더라도 제가 들여다볼라 치면 진저리를 치면서 홱, 뛰어나올 정도로 자존감이 강하던 아이가 결국 엎드린 자리에서 쉬야를 지리곤 축축해진 배를 한 채 저를 하염없이 쳐다보던 그 눈빛은 지금도 잊질 못합니다. 수치심이 가득한 얼굴... 어휴, 엄마야. 남도 아니고 너 아픈 거잖아. 그럼 그럴 수도 있지!!라는 위로가 아이에겐 그때... 닿긴 했을까요.


그날 이후로 가속도가 붙듯..  그 태산같이 커다랗고 바위처럼 단단하던 나의 큰 아들이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달 만에 몸무게가 반토막이 났으니까요.



병원을 다녀오던 날, 아이는 어디에서 힘이 난 건지 건강했을 때처럼 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가는 차들을 구경했습니다. 그게 거의 마지막 주였을 겁니다. 죽기 전날 저는 처음으로 아이를 제대로 안아줄 수 있었고 밤새 안고 아이에게 얼마나 그동안 감사했는지, 얼마나 든든했는지, 사랑했는지를 속삭였습니다.


그날은 월요일 아침이었습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 하나가 코로나가 확진되는 바람에 정말이지 아침부터 몰려들어오는 일로 뇌가 빠질 지경이었습니다. 메신저는 세 개가 울려대기 시작했고, 셋째는 간식을 달라 조르기 시작했으며 그 와중 가 걱정스러웠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동, 바리바리 반찬을 싸들고 오시는 중이었죠.


 여기저기 움직이다 정강이와 팔꿈치를 부딪혀 아야, 아야 하면서 정신없이 아이 수액과 밥을 준비했습니다. 수액은 어찌어찌  쓰윽 맞는데, 영 밥을 삼키려 들지 않고 단 한 번도 토하지 않았는데 옅게 토하더군요. 토하면 큰일, 이라는 수의사의 말을 떠올리며 이다음은 뭘 하지 하는 순간 아이가 소리 내 저를 불렀습니다.


어- 왜- 하는 순간, 눈을 마주하고 알겠더군요.

아, 떠나려는구나

나의 아이가 떠나기 위해 엄마를 불렀구나


사실 처음 맞는 죽음이기에 이것저것을 찾아봤었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은 비명을 세게 지른다던데, 혹은 몸을 뒤틀며 경련을 일으키거나 혀를 물어 피가 나거나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앙상하게 드러난 등뼈가 아플세라 두툼한 수건으로 감싸 안으니 아이는 와 눈을 마주치며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군요. 인간인  제가 고양이인 큰 아들이 보내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신호였습니다.

사랑해요,라는 고양이 키스.


아이는 그렇게 두 어번 눈을 깜빡이더니 엄마를 눈에 담겠다는 듯 눈을 고정하고는 다섯 번, 여섯 번 정도 숨을 내쉬고 고요하게 떠났습니다. 아파하지 않고, 비명을 지르지 않고, 혀를 깨물어 를 어쩔 줄 몰라하게 하지 않고, 그렇게 눈을 맞추며 끝까지 저를 사랑함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와중 메신저는 폭발하고 있었고, 집 근처 도착했다는 어머니의 연락은 계속 날아오고 아침부터 쳐내야 할 일들은 산더미.


하지만 아이와 저는 마치 전쟁 속 포화 한가운데서도 서로에게 집중하듯 고요히 마무리했습니다.




저에게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 그려진 작은 틴케이스가 다섯 개 있습니다. 애초에 애들의 유골함으로 마련해 뒀던 케이스였습니다.


그중 '꽃이 피는 아몬드 나무'는 좀 특별한 작품이지요. 자신의 동생인 테오가 낳은 아들, 즉 자신의 조카의 이름도 빈센트임을 알게 된 그가 기뻐하며 그린 그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큰 아들의 유골함으로 이 틴케이스를 선택했습니다.


큰 아이를 키우면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왜 우리 어머니께서 제 어린 날에 그토록 모질다 느껴질 정도로 혹독했는지. 그 기대와 그 바람, 그 시선을 저 역시 똑같이 큰 애에게 기대하고 바라고 봐온 게 아닌지. 이만큼은 해줘야지, 이 정도는 해야지, 큰 애니까, 장남이니까..라고요.

그래봤자, 그 애도 그저 작고 어린 아이 었을 뿐인데요.


아이가 떠나던 밤 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말 중에서도 아마 제가 제일 많이 했던 말은 엄마라서 미안했어,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잘 몰랐어, 그래도 네가 있어서 나는 너무 기쁘고 행복했고 안심했고 든든했어. 였던 것 같습니다.

아이를 통해 저는 저의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헤아리게 되었고 그때의 어머니는 그때의 최선을 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아이가 떠난 후에도 저는 사실 크게 울거나 애도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남은 아이들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지금 아이는 제 시선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 넷째 아이와 함께 작은 틴 케이스에 담겨서 저와 늘 함께 합니다. 당시에 아이 유골을 가지고 보석을 만들 수 있다고 했는데, 한 번 가공하고 나면 다시 되돌릴 수 없다 하여 아직은 유골인 상태입니다. 얼마 뒤에 제가 떠날 때 함께 할 수 있도록요.



그러니 선생님, 저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닌 이 모든 것들을 마무리하는 여행의 끝이자 마지막 안식처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이 다 떠난 뒤 저 역시 아이들과 함께 영영 쉬고 싶어요. 흔히 말하는 천국도, 지옥도 혹은 그 어딘가 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저 나의 아이들과 함께 영영 같이 하고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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