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아, 일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군요. 맞습니다, 저희 집은 천주교 집안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저는 신의 아이로 자리 잡았지요.
당연하게도 세례를 받았고 성당을 다녔고 성모 마리아의 동상 아래 쭈그리고 앉아 올려다본 어느 여름밤도 기억납니다.
여리고 여린 풀 냄새와 여름에는 쉽게 맡기 힘들 싱그러운 바람냄새, 동상 옆 그저 눈 한 번 깜빡이지도 않고 멀뚱하니 서 있던 백색 가로등, 발바닥 아래서 버스럭거리던 흙의 촉감, 저 멀리서 들려 그저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성가대의 뒤섞인 노랫소리.
그 이후 저희 집은 각자의 종교로 갈라서긴 했군요. 아버지는 기독교를 거쳐 다시 천주교로, 어머니는 그저 있는 천주교 신자로, 동생은 이젠 종교가 없는 듯도 합니다. 그리고 저. 신에게는 자살을 늘 꿈꾸는 고약하고 금쪽이 같은 딸내미.
구체적으로 종교가 있다, 없다를 말한다면 저는 종교가 없다에 속하지만 신의 존재를 묻는다면 저는 있다 쪽입니다. 설령 그 신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창작물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저는 신이 있다 생각합니다. 실제로 험악하던 저의 삶에 늘 마지막 옛다 손을 뻗어주시곤 하시니까요.
더는 안 돼, 더는 없어. 더는 무리야.라고 느낄 때 불쑥 뭐 하나 툭 던져주는 나의 아버지. 뭐 주실 거면 좀 덜 아프고 덜 서러울 때 주시면 좀 좋아, 툴툴대도 아랑곳없이 여전히. 심지어 길에 떨어진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눈에 띄게 해서 줍게 한대도 나무에 부딪히거나 엎어지게라도 만드시는 심보 고약한 양반.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지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는 성당 묘소에도 묻히지 못한다 합니다. 지금도 일부 목사님들은 성령이 충분하지 못해 자살하는 거다, 그렇게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거다. 치켜든 검지 손가락을 흔들며 소리 높여 강당 마이크에 대고 소리칩니다. 자살한 자는 지옥 갑니다.
저는 지옥에 갈까요.
나의 심보 고약하고 짓궂은 아버지는 그리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간 저를 마주하시고는 뭐라 하실까요.
이마짚부터 하실지도요.이 골칫덩어리야.
그러나 막상 자살을 했다고 해서 지옥에 떨어진다면 좀 서운하긴 합니다, 선생님.
일생 진짜 열심히 살았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착하게 살아가려 노력했고 열심히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4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말 남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퇴근하고 마주하는 아이들 얼굴을 볼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살았습니다. 완벽하진 못했고, 뜻하지 않은 상황으로 누군가를 아프게 하거나 상처 냈을 수는 있지만 결코,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해치거나 아프게 한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지만 한순간의 선택으로 그 모든 것들이 없던 일처럼 취급된다는 건 참 서운하고도 섭섭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지옥에 꼭 갈 수밖에 없다면 그렇다면 저는... 가기 전 꼭 한 가지 하고 싶은 게 있긴 합니다.
지옥에 가지 않고 아이들과 모두 같이 살아갈 수 있으면 너무도 행복할 것 같지만, 절대 안 된다면, 절대로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고 한다면 저는,
아이들의 엄마. 아이들의 다섯 엄마를 꼭 만나고 싶습니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다 놓치고 떠나보낸 그 엄마들에게 아이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제가 아이들의 엄마들을 만나는 시점이라면 이미 아이들도 다 각자의 엄마들을 만나 찾아갔을 터이니 그저 어렸을 때와 어떻게 자라왔는지만 이야기를 해주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이들이 첫걸음을 뗀 일, 이갈이를 하느라 송곳니가 두 개가 되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두 파랗던 눈동자 색이 각자의 색을 찾아갈 때며 중성화한다고 수술한 일, 특히 첫째가 저와 얼마나 투닥거렸는지 또 얼마나 의지가 되었는지, 의젓한 둘째가 동생들을 어떻게 키워왔는지, 다정하고 상냥하고 포근한 셋째가 얼마나 저에게 중요했는지, 넷째는 아픈 순간에도 티를 안 내고 혼자 씩씩하게 넘기는 통에 훗날 알게 되어 얼마나 마음이 아팠었는지, 그리고 우리 막내. 막내 멍멍이는 같이 있는 내내 웃고 또 웃고 얼마나 저를 웃음으로 채워줬는지.... 하나하나. 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배 아파 세상에 내놓은 아이를, 그 험하고 평온치 않은 삶과 터전 안에서 배에 몇 개월째 넣고 살면서 지켜냈을 그 생명을 떼어놓거나 잃어버렸을 때의 아이들 엄마들은. 셋째는 꼬리 끝이 꺾여 있는데, 이건 배속에 형제들이 많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셋째의 꼬리 끝을 만질 때마다 우리 아들은 다복한 집에 태어났구나,라고 생각하곤 했지요.
그 아이들을 세상 속에 두고 어떠한 사정으로 그 한 달짜리 핏덩이들을 떼어냈을지, 그 마음이 어땠을지... 저는 그저 아이들 뛰놀다가 발끝 걸려 손톱 끝에 피가 맺혀도 헉, 하고 숨이 멎을 듯 깜짝 놀라는데요.
그래서 말해주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줘서 감사하다고. 그 아이들로 인해 저의 어둡고 하얗기만 한 세상으로 알록달록한 물이 들었다고. 그래서 참 아름다웠다고.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진작에 삶의 궤도를 잃고 가라앉았을 거라고. 그 아이들을 제게 보내주어서 너무도 감사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