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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열 4시간전

애 딸린 유부남

내가 하는 사랑들은 모두 자해와 같았다.


1.

사람을 가장 잘 아는 방법은 그 사람을 곁에서 오랫동안 함께해오면

구태여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연인들은 진부하게도

'알아가고 싶어'라는 말을 꺼내게 된다.

믿음이 없는 사랑은 가능하지만 사랑 없는 믿음은 사람을 무척 비참하게 만든다.



2.

불행한 사람은 본능적으로 맡을 수 있는 우리들끼리만의 냄새가 있다.

잿빛이 돌고, 보랏빛이 섞인 그런 냄새.

우리는 그 지점에서 만났다.

3년을.


내게는 그가 호텔 프론트에 가짜 이름과 가짜 전화번호를 적힌 것 같은 존재였다.


마흔 살이 넘은 남자였으나 굉장히 아이같은 녀석이었다.

'애'같은 면모가 간혹 튀어나왔고,

내 눈에 씌인 콩깍지는 그걸 모두 귀엽게만 받아들였다.

찌질하다는 면에선 우리 아빠와 무척 비슷했지만 그 둘은 한끗차이로 아저씨는 내 사랑을 받았고 아빠는 내게 혐오를 받았다. 그러나 내 사랑을 받은 사람은 둘 중 한 명도 없고 아빠같은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모순적으로 다가왔다.




언제 죽을지 하루 하루를 고민하던 내게 그는 당일 지급되는 '일급' 같은 존재였다.

오늘 하루를 살아있으니까 볼 수 있었던 너.


그리고 순진하고, 어리고,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몰랐던 나.


정에 굶주리는 사람은

조그마한 친절에도 자존심도 없이 매달리고 목을 매기 마련이다.

나는 한때 그가 나와 공범이 되어주겠다는 말이 무척 반가웠던 때가 있었다.

네 덕분에 갓 성인이 된 내 몸에 자해 자국은 점점 없어졌다.


3.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관심사를 찾아보려 이런 저런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가 한두마디 정도는 거들어 주길 기다리며 여러 시답잖고 재미없는 이야기만 주구장창 늘어놓았다.



그러나 아무리 이야기 하기 싫은게 있더라도 꼭 말을 해줘야 했던 게 하나 있었다.

본인의 혼인 사실, 자녀.


아무리 그가 자신의 와이프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이혼이나 가정을 그대로 지켜내려고 노력을 하는 선택을 하지 못한채로)

부도덕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찌질하고 무책임한지 알 수 있게 해줬다.



우연히 그의 핸드폰으로 볼 수 밖에 없던 그의 집은 실로 기형적이었다.

우리집이 공포와 서늘한 감촉이 도는 공간이었다면,

그의 가정은 다른 의미로 파탄이 난 집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일반적인 범주의 사람이라고 가정을 했다. 아이 하나가 있는데 이혼 정도 요즘은 했을 수도 있는거지. 라며.

그러나 그에게 무죄 추정의 원칙따위는 사치였다.

얼마든지 내게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고의적으로 혼인 사실을 속이고 기만적인 관계를 지속해왔다.

'넌 어차피 나 좋아하잖아.'라는 남자 특유의 자신감으로.



당시엔 충격에 제대로 상황 대처라던지 조리있게 말을 제대로 못했다.

그대로 그를 돌려보내고 잠을 자지 못했고 밥도 먹지 못하여 그와중에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망고주스 한 잔으로 연명하던 날이 일주일이 되었다.



이후 그에게 연락을 했을때 그가 내게 했던 말은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마음을 주래?" 였다.

아. 한동안 잊고 살았었다.

나 아픈 사람이었지.

나는 나를 아낀 적이 없었지.


4.


대한민국 헌법 11조는 만인의 평등을 규정해주었지만

나는 노예를 자처했다.


어떻게 하면 예쁨받을 수 있는 거지

어떻게 하면 버려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도 내 목줄을 스스로 선택해서 그에게 쥐어주었으니,

반쯤은 성공한 것이었다.



만날 때마다 나는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아주 들뜬 구름색으로 설레게 “내가 정말 많이 좋아해요” 라고 말할 때마다 그는 그런 사랑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의 얼굴을 짓곤 했다.


나는 인간관계를 늘 필요에 따라 사귀는 사회 부적응 싸이코패스였기 때문에 그가 나를 이용해먹어도 상관이 없었다.


나는 당신에게 내 20대, 섹스, 사랑을 줄게.

너는 내게 안정감을 줘. 나는 그거 하나만으로 돼.



그러나

나 홀로 쌓아온 애착관계는 마치

두 명이서 하는 온라인 게임에서 상대방이 말 없이 화장실에 가느라 로그아웃 해버린 상태에서

나는 그 사실을 모른채 계속 길을 잃은 채로 헤매는 것 같았다.



8시간의 답장 텀,

안읽씹, 필찾.


그게 어느정도 당연해졌을 때 나는

그를 기다리는게 당연해졌다.

'네가 나를 떠나지 않으면 나는 항상 같은 자리에 있어.' 라는 그의 말 하나 때문에.

나는 이게 그토록 원하던 것이었는데, 이상하게 불안감을 없애주진 못했다.

사람의 무의식 적인 감각은 영원하다.


5.

그러니까, 관계의 주도권이 내게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밀어나면 밀려나고

내가 찾아서 매달려야 만날 수 있는 관계.


우리가 만나던 주기는 일주일이었고,

나는 매번 그 주기가 언제 깨질지 몰라 매번 노심초사하며

그를 만날 때마다 한 번 먹을 그의 친절과 나머지 일주일을 버틸 가짜 마음을 도시락처럼 싸서 하루하루를 나눠먹었다.

그러면 어떤 날은 굶주리던 날도, 어떤 날은 넘쳐 흐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연명해서 사는게 의미가 있나.

차라리 불륜 사실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살이라도 하면 누군가 나를 불쌍하게 봐주기라도 하지.

나는 존나 위선적인 나쁜 년이었다.



6.

혼인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합리화 덕분이었다.

어차피 이미 가정이 파탄난 집안이면

나는 내 모든 정을 빠른 시일 내로 털어내서 미워할 구실을 만들고

그의 와이프 번호를 알아내는게 내게 주어진 할 일이었다.


사람을 가장 잘 아는 방법은 그 사람을 곁에서 오랫동안 함께해오면

구태여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연인들은 진부하게도 '알아가고 싶어'라는 말을 꺼내게 된다.

나는 그 '알아가고 싶어'라는 말 대신

혼자서 매일 조금씩 그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갔고,

미워할 구실을 하나씩 만들어서 그를 내 삶 전체에서 조금씩 떼어냈다.




면전에 대고 멱살을 잡고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채로 말하고 싶었다.

함부로 다정하게 굴지 마. 너 내가 어떤 앤지 뻔히 알고 있었잖아. 외로운 사람을 오해하게 만들지 마.


그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

그러나 어떤 침묵은 거짓에 포함된다. 아주 많은 사랑은 거짓에서 시작된다.


7.

내게 필요했던 건 정서적 안정감이었다.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내 곁에 있어줄 것이고

나쁜 꿈을 꾸다 깼을때 옆에 누워있을거고

내가 죽을 것 같거나 불안정할 때마다 두꺼운 이불로 덮어줄 것이라고.


영원한 건 당연히 없지만 안정적으로 내 옆에서 나를 봐주거나 찾아줄 사람.

그게 너였는데 나는 모순적이게도 내 손으로 떼어내야했다.



그를 물리적으로 떼어내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었다.

바람피는 사람 특성상 쉬이 질리는 성격이었던지라 나는 그가 위험할거라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고,

비밀스러운 연락 수단이었던 경로 마저 나가면 우리 둘은 연락할 방도가 전혀 없었으며,

그는 나를 찾을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연락 마저도 8시간에 한 번 연락 텀이었다면

그를 잊을 것도 없었다. 연락이 없어도 허전하지 않아서 좋았다.

너를 좋아했을땐 그게 괴로웠는데.

하나가 편하면 다른 하나는 언젠간 꼭 불편해지고

하나가 불편하면 다른 하나가 언젠간 꼭 달게 느껴진다.



8.

그에 대한 생각은 +도 -도 아니었다.

그냥 그런 재수 대가리 없던 애가 있었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 우리 아빠만큼 찌질한 자식을 만났다고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마치, 사람구실을 못하는 남자가 어떤 여자와 결혼해서 잡혀살고 갈궈져서 겨우 사람이 된

전형적인 유부남 같은 행실이 많았다.

나는 법을 어겨서라도 내 정서적인 안정감을 유지해야했다.

내가 무너지는 게 더 두려웠다.

동시에 들었던 건 죄책감.

난 아직도 그 집에 갇혀있다.

피해자 행실도 못한다.

그래도 나는 그가 밉다.

당신보다 한참 어린 여자가 쉬웠겠지. 또 못꼬실 수가 없었겠지. 금방이라도 부서질것 같던 나를 살살 꾀여내어 만나는게 무척 쉬웠겠지.



9.

딱히 그가 잘 못살았으면 좋겠다고 저주를 해보진 않았다.

어린 나의 눈에도 제일 쉽게 볼 수 있었던건, 그의 말로였다.

'저 사람 내가 구태여 미워하지 않아도 지 혼자 알아서 무너지겠다.'라는 생각.

그래서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다.


술과 약에 꼴아서 나를 찾아오면 그게 반가우면서도 미웠는데.

정신차리고 와이프에게 잘해라. 너 어차피 몸때문에 나 만나는거 다 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니 딸 학교 데려다줘야 하는거 내가 다 알고 있다. 술부터 첫 차 타고 떠나라. 라고 말할 때마다 사실 나만 좋아해줬으면 좋겠다는 이 이중적인 감정의 괴리감이 가슴을 너무도 미어지게 만들어서

그가 다음 날 '어제 무슨 일 있었어?'라고 물을때마다

'응, 있었지. 내가 시험지로 니 뺨을 때려서 실핏줄이 터졌지'라고 말하는 대신

"없었어. 그냥 팔 먹고 싶어서 조금 깨물다가 잠들었어"라고만 대답한다.

그러면 넌 그걸 또 철썩같이 믿어. 무책임하게 니 딸 등교도 못해주고.

나는 당신이 술에 꼴아 나를 찾아온 어떤 정크 같은 마음을 하나씩 모으고 당신의 딸 등교를 못시켰다는게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덕성의 문제에 관해 괴로웠다.


나만 아는 추한 속 사정.

누구도 공감 못하는 속 사정.


덕분에 나는 연애나 결혼에 모든 관심과 환상이 사라져버렸다.


안녕. 내 10대의 생명의 은인,

내 20대를 망칠뻔한 주범,

은아.

나는 너도 못지않게 불쌍하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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