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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열 Nov 21. 2024

전문대생이 의대를 붙었다

10개월 간의 재수 수기

1.

내가 다녔던 학교는 전문대 방사선과였다.

보건쪽이나 취업면에서는 대단하다고 본인들 사이에서 자랑하는 곳이었지만 정작 현실은 일반인들이라면 모를법한 듣보잡 지잡 2,3년제 전문대에 불과했다.


그곳에서 나는 '직업엔 귀천이 없다', '학력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라는 말이 얼마나 표면적인 가식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 말을 믿었던 나는 정말 미성숙하고, 어리고, 유아기적 환상에 빠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학력이 중요한 이유는, 본인이 조금 초라해도 주변 친구들을 보면서 배워가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게 정말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공했던 기억이 나중에 어떤 도전과 시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내가 나를 간단하게 설명하거나 대변해야할 때 학력 하나로 퉁쳐질 수 있는 요소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실무가 중요해도, 결국엔 그들이 원하는 것은 4년제다. 적어도 내가 건너 들어온 세상에선 그래왔다.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에게는 대학이라는 신분상승의 기회였겠지만,  무언갈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과 발전을 갈구하던 내게, 전문대라는 환경은 꽤나 큰 타격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다녔던 학교는 위법을 저지르거나, 일반인의 상식을 벗어나는 행위가 굉장히 만연하는 곳이었고, 그러한 것들이 굉장히 위험하게 작용했다. 나는 그곳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제대로 배웠다.  


당신이 사교성이 좋거나 외모가 출중하거나 부모님의 재력이 뒷받침된다면 학력은 구태여 목 맬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런쪽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고, 비윤리적인 행위나 틀린 말들, 혹은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하는 성격이었던지라, 강강약약과 같은 그런 세상물정 모르는 머가리 꽃밭 같은 상상과는 달리, 하극상으로 변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한다.

한 사람이 그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일반화가 다분해서 싫어하는 말이었지만 결국 동기들이 그 학교가 되어버렸다. 그 학교가 전형적인 '전문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들도 구색이란걸 갖추고 싶어했어서, 그들은 제대로 공부해본 적도 없으면서 자꾸만 4년제 대학교와 맞먹으려는 이상하고 양심없는 시도를 자꾸만 해댔다.

방사선사는 '면허증'이 필요한 엄연한 (의료인이 아니라)의료기사지만 실습을 돌 때 몇 몇 선생님들은 이미 알고 계셨다. 똘똘한 고등학생 앉혀놓아도 할 수는 있는 일이라고.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고.


그 정곡을 찌르는 말은 실습생 신분이었던 나를 촬영실에 혼자 일을 시키고 남겨두고 떠나가신 선생님의 지시로 인해 하나의 완벽한 방증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도 그럴것이, 인맥이 권력이 되는 학교에서 나와는 너무나 달랐던 그들과 친분을 맺지 못해, 내쪽으로는 자료나 정보가 전달되지 못하고, 공지방에서 혼자 누락되는 사태가 발생했어도, 국시를 일주일만 공부해도 합격하는 국가고시였던걸 보면 그다지 되기 어려운 직업은 아니었다. 당장 인터넷을 뒤져봐도 알바를 구하는 글은 널려있다.



2.

3,4년 동안 쌓이고 뭉친 어떤 형태의 크고 단단한 분노가 나를 망설임도 없이 재수학원으로 가게 만들었다.

당시의 나도 대단한 인간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전문대와 유명 대학병원에서 마주한 여러가지 비윤리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의 추악한 행위들이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이거 의료법 위반이고요, 환자한테 그러면 안되는거 아니에요?' 라고 말할 힘이, 권력이 내게 없었다.


그렇게 운 좋게 유시험 전형에서 강남에 있는 어떤 유명한 대형 재종에 들어갔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그 성적이 왜 뽑혔는지 모른다. (대대로 검정고시생과 삼수생은 받지도 않던 곳이었는데, 아마 학원 사정이 어려웠겠지.)


입학 허가 안내를 받았을 땐, 대학이라도 붙은 것 처럼 기뻐하며 더 치열하게 공부했던 것 같다.

입학하던 그 날은 2월 19일이었던 것도 기억한다.

상처를 받아 방어기제를 갑옷 처럼 온몸에 두르고 피난민 마냥 도망치듯 학원에 갔을 때, 그곳은 점차 나의 안식처로 변해갔다. 밖과 철저히 단절된,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장소. 주변 시선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내가 나를 돌볼 수 있는 안식처. 나의 방공호.


그곳에서 형성된 인간관계는 짝꿍이었던 아이들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 배식해주는 분들로 인해 가끔씩 내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다.

수업 관련해서 무언갈 물어봤을 때, 주변 아이들은 정말 친절하게 가르쳐줬고,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몰래 자료를 놓고 가주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들은 내가 인사를 하거나 가벼운 인사치레에 웃음 없이 받아주는 날이 없었고, 식사 시간에도 눈치를 보며 추가배식을 욕먹을까봐 머뭇거리며 서성일 때 아낌없이 살가운 말로 더 주는 직원분들에 한동안은 적응하지 못했다.

굳은살은 이불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알지 못한다.



3.

성실과 노력은 그 모든 것들을 다 이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특별히 내게는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 같다.

교육과정이 완전히 바뀌어있었고, 문과였던 나는 이과 수업을 체득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과학탐구 선택에서 꽤 애를 먹었지만 긴 고민 없이 생물1과 물리학2를 선택했다. 전적대학에서 배운게 이거 두 개 밖엔 없었어서.

"전문대따위가 내 20대 초반을 다 잡아먹고 해준게 없으면 이런식으로라도 도움이 되어야지"라는 나 혼자가 만들어낸 찌질한 분노로.


10대를 공부에 전부 갈아넣은 아이들은 그 어려운 사설 시험에서 몇몇 천재 같은 기지를 발휘했다.

그 능력이 너무 부러워서, 나도 같은 무리에 섞이고 싶어서 무식하게, 정말 무식하게 덤벼들었다. 그 과정에서 '수능장에서 내가 모르는 문제는 없어야한다'라는 강박 하나가 생겼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수업을 알아듣는 척이라도 해서 결국 끝끝내 알아들었고, 수학 같은 수업에선 풀이과정을 전부 외워버렸다. 국어에서 생기는 오답에 승복이 되지 않아도 평가원이 곧 신이기에 나를 바꾸고 잘라내서라도 어떻게든 해설지에 욱여넣고 나를 끼워맞췄다. 혼자서 정말 모르겠는 기본적인 문제를 마주했을 땐 세 명의 선생님 ebs 강의를 돌려보고 질문 당직 선생님께 찾아가서 질문을 했다. '제가 수능이 5년만에 처음인데요...'라고 주눅이 들어 눈치를 보면 누구든 친절하게 선생님이 되어주려했다. 대학 다닐 때 교수님들은 자꾸 약속을 파투내거나 기피하고 이걸 모르냐고 혼났는데...

한 가지 환경에 오랫동안 적응하면 그 환경이 한 사람의 완전한 세상이 되어버린다.

어쨌거나, 나는 첫 시험 수학 30점에서 차근히 올라 마지막 모의고사에서 6,70점까지 올린 경험을 했다.


대학교에 관해서도,

원래 대로라면 밖에서 대학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말해도 모르는 전문대생이라는게 창피하게만 느껴졌을텐데, 학원 안에서는 그다지 부끄럽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이제 다른 대학 갈거니까.'

'어차피 이제 거긴 내 학교가 아니니까.' 이런 생각들 덕분에.


나는 이곳에서 철저히 짓이겨져서 더이상 소생이 불가능할것만 같던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베푸는 것과 받는 것에도 당연한 그 친절,

나는 한 번도 예쁘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예쁘다는 말,

차곡히 쌓아올린 성적표를 보고 해주시는 노력들의 칭찬.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이 나를 만든 거다. 학원에 있었던 모든 사람 덕분에.

가위바위보에서 보가 바위를 이기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내면의 폭력성은 더 큰 폭력으로 죽여지는게 아닌 부드럽고 유한 것들로 점점 닳아지다가 묵살되었다.



4.

7월엔 누구나 겪는다는 슬럼프가 잠시 왔었다. 하지만 그다지 위협이 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6월 모의고사 성적으로 수시 원서를 어디에 넣을건지 상담이 있었고, 거기서 뵌 입시 실장님과의 대화가 꽤나 큰 영향을 주었다. 선생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학생들을 얼마나 아끼고 배려하는지 알 수 있게 했다. 나는 그 날의 기억들로 하루하루를 먹고 살았다.

그 과정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주변을 돌아볼 기회가 생겼고, 왜 '끼리끼리'라는 말이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내려왔는지, 왜 '관상은 과학'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닌지 알 수 있었다.

겉모습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나쁜 것이지만, 환경이 만들어내는 사람의 겉모습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학교를 잊을 때쯤엔 전적대학에서 취업조사를 하려 자꾸만 구글폼 작성을 요구했고,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당신들과 달라'라는 재수없는 생각으로 철저히 외면했다. 정말 어리고 오만하고, 하늘을 찌르는 자만이었다.

하지만 그런식의 연락이 수험생활의 졸음을 깨는데 꽤 도움이 되었다.

'화가 나면 잠이 깬다'라는 말은 결국 참인 셈이었다. 이따금씩 졸릴때면 몇 번이고 전적대학을 생각해냈다.

그런데 10월쯤 들어섰을까, 분노라는 감정도 꽤나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전문대 따위가 내 20대 초반을 망쳐놨으면 이런 식으로라도 도움이 되어야지'라는 생각에 잠을 깨는 용도였다면, 이제는 어느정도 감정이 무뎌졌다. 익숙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포용에 가까운 의미다.

'나'라는 사람은 점점 포용을 할 줄도 알고 유해졌다.

환경은 날 선 사람을 이토록 크게 바꾸어버리곤 한다.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도 꽤나 경박한 인간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사람'을 배웠던 것 같다.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도 무례한 사람들 만나면 학교를 다닐때의 기억으로 어느정도 눈치껏 유도리있게 대처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5. 수능


거진 10개월간의 치열한 공부였다.

수능을 보기 일주일 전은 난임 인공수정으로 겨우겨우 출산을 앞둔 노산 임산부가 된 느낌이었다.

'제발 막달이니까 사산되지 말고, 유산되지 말고, 건강하게만 나와다오. 건강하게만' 이런 기분.

누군가는 이게 대체 무슨 비유냐며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게는 그만큼 간절하고, 소중한 하나의 '기회'였다. 지금 가면 다시는 없을 내 마지막 수능.


막상 수능을 보는 당일이 되었을 때, 사실 별로 떨리지가 않았다.

지각 한 번을 하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악바리로 지켜낸 새벽 아침,

11시까지 추가 야간 자습으로 쌓아올린 시간들,

더러워진 책들,

내 손을 거쳐간 수많은 펜들.

이런 것들이 굳은 살이 되어 아주 단단한 방화복으로 만들어져있었다.  

대신 아주 잠깐은 '얼마나 불수능이려고 날씨가 이렇게 더울까' 싶어서 잠시 겁을 먹었다.

수능은 그래도 수능이었던 거다.

마지막 과학 탐구시험을 치를 때는, 30분이 이렇게 짧은가 싶을 정도로 그 어리고 똑똑한 수험생들이 이런걸 30분 안에 풀어냈었구나 정말 대단하다는 존경심 밖엔 안들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하늘이 이런 나를 불쌍하게라도 여겨준 것인지, 의대 증원을 비롯한 모든 혼란스러운 상황들이 내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올해 운이 정말 좋았던 거다. 정말. 그래, 운이 좋았다.

나 같은 부족한 놈이 운을 잘 타고나서 의대와 수의대에 지원을 했을 때, 잠시 복수를 하는 상상을 했다.

너희의 그 얕고 보잘것 없는 인맥을 내게 무기로 사용했듯, 내가 의사가 되었을 때 방사선사 나부랭이가 인생의 유일한 업적이자 전부인 너희에게 어디까지 힘을 가할 수 있는지를.

그러니까, 매번 맞고만 있던 남자 아이가 15살 여름방학이 지나서 체구가 많이 커졌을때 복수를 상상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들의 천박한 따돌림, 화장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임테기, 의미 없는 서열 나누기, 교수님의 경박한 언행.

그러나 천성적으로 정말 여유가 있고 성격이 좋은 사람들은 이미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최승호의 북어가 저편에서 "너도 북어지"/"너도 북어지" 말하는 것 같다.



학원을 종강하고 나올 때 나는 상담 실장님께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학력이 가지는 어떤 힘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재수 학원을 오게 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설명 했다.

알고는 있다. 3,40대가 되면 이러한 욕심은 결국 부질없는 고민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학력을 가졌을때 저절로 따라오는 많은 것들은 하필 내가 갖고 싶었던 것들이라,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쉽게 예를 들 수 있는 편입의 경우에서도 지원할 수 있는 학과에서부터 4년제는 3년제 학교 보다 앞서있었다.



6.

나는 절대로 올해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공부 고민을 털어놓으면 "꼴값떠네. 걍 대충 살아"가 아니라 진심으로 같이 고민해줬던 선생님들.

개그코드가 조금 이상한 곳에 있어서 "우리 담임 선생님을 적분하면 부원장님이 된다"는 개그에 억지로 같이 웃는 것이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너도 적분하면 대학생 되잖아" 라고 같이 동참해주는 친구들.

도움을 요청하면 노골적으로 알면서 모른다고 하거나 떠넘기고 조리돌림하는 그런 문화가 아니라 친절하게 알려주는 걸 넘어서 챙겨주기까지 했던 짝꿍들. 반대로 내가 최대한 도움을 줄 때도 고깝게 여기는게 아니라 고마워할 줄 알았던 짝꿍들.

사람은 사람을 만든다.

과거엔 하루하루가 '제발 오늘은 아무 일도 없어라'라는 고민은 올해 입학 당시, '욕을 먹더라도 힘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돌아와야지'라는 어린 생각으로 변했고, 끝으로 갈수록 점점 '더 배우고 싶다. 그들과 닮아가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마무리되었다.


올해 논술을 보러 다니면서 웅장한 캠퍼스, 예쁜 캠퍼스를 보고 "이런 곳을 대학교라고 하는구나" 싶은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꼭 합격해서 유례 없는 성적 상승의 신화라고 학원 홍보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고졸검정고시 3년제 지잡 듣보잡 전문대 학생이 의대를 입학해서 왔다"고.

선생님이셨던 나의 부모님은 내 가채점 성적표를 보고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한 일이라고 표현했고, 30년 동안 본 적이 없는 현상이라고 말해주셨다. 완벽만을 추구하고 엄격했던 부모님. 나는 처음으로 태어나서 인정을 받았다.




글에서 묻어나듯 나는 어떤 면에서 정말 부족한 사람이지만,

부족한 곳에서 고쳐나가고 만들어졌기에 입시가 정말 고된 학생들에게 당신들이 절대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고 알려줄 수 있다.


어떤 학생은 이미 다 만들어져서 태어나는 천재적인 학생을 보고 노력은 부질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노력으로 쌓아올린 것들은 결코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 단단함을 가지고 있으며 본인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뒤쳐지거나 부족한 어린 학생들을 훨씬 더 잘 이끌 수 있다.

다 가진 자가 원하는 것과 아무것도 없는 자가 갈망하는 정도는 분명히 다르다.

당신들이 해온 일들은 웬만한 어른들도 힘들어서 못하는 대단한 것들이다.

그 공부와 노력들이 당신의 성장에 매우 크게 작용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노력해서 안되는 건 없다. 성적이 거지같아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그 믿음이 수능장에선 무섭도록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똑똑한 당신들에게 이 말이 꼭 하고 싶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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