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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행복조각

by 윤기






18년 전 초저녁이었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강변역 주변 포장마차에서 동창들과 한잔하기로 했단 연락이었다. 일이 늦게 끝나 한참 뒤에 합류했는데 친구들은 벌써 만취 상태였다. 얼마 지나자 포차를 꽉 채웠던 손님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3차를 가는 건지 귀가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급하게 허전해진 공간이 어색해 보여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졌다. 그렇게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에 들어있던 필름은 하필 감도 100짜리라 어두운 포장마차에선 노출이 나오지 않았다. 강제로 감도를 올린 후 현상을 맡길 때 2 스탑 푸시를 요청했다. 나중에 스캔한 사진을 찾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입자가 거칠고 콘트라스트도 강한 이미지였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실제보다 어둡고 강하게 나왔지만 달리보니 그때 담고 싶던 모습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으니까. 대단한 사진도 아니지만 내겐 친구들과 추억이 깃든 날에 담은 것이라 조금 특별하다.


며칠 전에 후배랑 점심을 먹은 후 카페로 이동하자 화두는 AI가 됐다. 급속도로 성장하는 AI의 기술 이야기는 어느새 '사진'으로까지 번졌다. 요즘 AI로 만들어 낸 사진은 인간의 눈으로 구분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어색한 사진도 수두룩하지만 각 잡고 제대로 만들면 구분할 수 없다. 그렇다면 훗날 사진을 찍는 행위는 도대체 어떤 의미로 존재할 수 있을까? 사진가의 존재는 왜 필요할까? 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요즘이라 후배와의 대화가 흥미로우면서도 씁쓸했다.


대화 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필름과 디지털'


나중에 내가 찍은 사진이 AI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하는 때가 만약에 온다면, 대부분의 작업을 디지털로 하는 지금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봤다.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이미지도 원본이 있지만 이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디지털 파일'의 형태였다. AI시대가 본격화되면 그 '원본'이라는 것도 더욱 조작이 쉬울 거였다. 그렇다면 물성이 있는 필름은? 셔터가 열리며 노광 된 필름에서 일어난 화학반응까지 AI가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있다고 한들(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셔터를 누른 그 순간까지 만들어낼 순 없을 거였다. 결국은 필름이었다. 필름이야말로 사진의 완벽한(지금 관점에서 보면) 원본이 될 수 있겠단 결론에 다다랐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매번 현상과 스캔을 맡겨야 하는 번거로움은 밀쳐두고라도 너무나 올라버린 필름 값을 생각하니 골치가 아파졌다.


그것도 잠시였다. 나는 어느새 로켓으로 배송을 해준다는 곳에서 필름 3롤을 주문하고 있었다. AI를 활용하면서도 AI에게 정복당하기 싫은 양가감정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나는 사진을 만들어내고 싶은 게 아니라 사진으로 기록을 하고 싶은 거다. 기록할 때 카메라를 들고 싶은 거다.


기록하는 순간에 느끼는 행복조차 기계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을 뿐이다.









글쟁이 친구들과 '사랑'을 주제로 한 원고가 드디어 모였다. 글의 순서를 배열하고 목차를 결정한 후 합본을 했다. 양식을 다듬어 출판사에 A4 기준 50p를 넘겼다. 교정 작업이 진행될 동안 디자인 팀에선 표지 작업을 할 거라 레퍼런스로 보낼 표지를 찾아 애정하는 서점을 찾았다.


이전에는 어떤 사이즈로 책을 만들지, 표지는 어떤 게 좋을지 고민하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했었다. 그동안 책을 보면서 '표지 예쁘네'란 생각은 했어도 판형 사이즈가 어떻게 되는지 표지 날개나 책등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내 책을 지을 때 북 디자이너와 소통하며 느낀 게 많아졌다. 그리고 지난 공저 책의 인쇄본을 직접 만들면서 많은 걸 느끼게 됐다. 책 만드는 게 언뜻 보면 쉬워 보이지만 신경 쓸 것이 상당하고 여기저기 들어가는 품도 많다는걸.


겨우 두 번이지만 그 알량한 경험이라도 한 덕분에 이번엔 표지를 찾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예전 같았으면 스트레스를 잔뜩 받았을 텐데 소풍 가듯이 서점을 방문했다. 만약 이곳에 마음에 드는 표지가 없다면 다른 서점으로 가면 될 일이었고 그걸 구실 삼아 서점 몇 군데를 마실 가듯 돌아봐도 되겠다 생각하니 오히려 신이 났다.


하지만 처음 간 서점에서 마음에 드는 표지를 몇 개 발견하자 기쁜 마음과 동시에 약간의 아쉬움이 들었다. 우선 동료들에게 어떤지 물었더니 모두 긍정의 표시를 보내줬다. 아마도 다음 서점은 가지 않아도 될 모양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니 더 좋은 결과가 나온 걸까? 내가 마음에 들어 했던 표지를 그들도 좋아해 줘서 다행이다.









러닝을 쉬는 날이었다. 밤엔 제법 날이 선선해져서 산책이나 나가려다 사진도 찍으면 좋겠다 싶어 카메라 가방을 챙겼다. 줌렌즈를 물린 미러리스 한 대와 스트릿 사진 용도의 단렌즈 카메라를 한 대 챙겼다. 잠실대교 아래에 도착하자 내 책에 담았던 장면이 눈에 들어와 한참을 바라봤다. 그때 담지 못했던, 혹은 나를 비껴갔던 시선이 있었을까 싶어 교각을 노려봤다. 평소라면 10분이면 갔을 거리를 사진을 찍으며 걸으니 2배나 넘게 걸렸다.


조금 더 걷자 잠실철교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철교를 꼭 건너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정해진 것도 없는데 마음 가는 데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교엔 한강 산책로와 달리 걷는 사람도, 운동을 하는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사진 찍기엔 더 좋았다. 사람이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아서.


철교 끝에 다다랐을 때였다. 우측으로 나 있는 계단은 한강 공원으로 연결된 것이었고 정면에 보이는 굴다리는 잠실나루역으로 연결된 것 같았다. 한강 쪽 계단은 뻔해 보여 정면에 있는 길이 궁금해졌다. 저곳으로 나가면 혹시 다른 길을 지나 한강으로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표지판을 찾아보는데 한 남자가 그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실례한단 말을 건네고 길을 물었다. 혹시 저곳으로 나가면 다시 한강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있느냐고. 그가 내 말을 듣더니 다소 황당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내 뒤를 가리키며 말을 뱉었다. 한강을 가려면 저쪽 계단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뒤를 돌아보니 조금 전 내 우측에 있던 계단이었다. 감사하단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옮기려는데 그가 내게 한 마디를 더 보태며 손가락을 서쪽으로 멀리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한강을 보기에 좋은 포인트가 있어요"

"아! 네네. 하하. 감사합니다!"


그제야 줌렌즈를 물린 카메라가 내 손에 들려있단 걸 알았다. 그의 눈엔 내가 출사 나온 사람으로 보였나 보다. 작정하고 사진 찍으러 나온 건 아니었지만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산책하며 사진을 찍든, 사진을 찍으며 산책하든 무슨 상관인가. 손에 카메라가 들려있으면 사진 찍는 사람인 거지.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지나가던 행인의 안내가 새삼 더 감사해졌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답을 해준 것도 감사한데 멋진 뷰 포인트까지 알려주다니! 멋진 사람이란 생각이 들며 미소가 번졌다.


'혹시... 저 사람도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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