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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행복조각

by 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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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네와 함께 일주일 정도 휴가를 다녀왔다. 저번 주부터 이번 주까지 이어진 긴 휴가였다.


처형네 식구는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고 우리 부부는 차박을 할 겸 새벽에 출발했다. 두 시간을 조금 넘게 달려 도착한 고성의 바다는 어두움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바람에 묻어온 짠내와 해안가에서 부서진 파도 소리만이 바닷가에 있단 걸 알려주었다. 파란 바다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 준 건 쏟아지는 별빛이었다. 모든 것이 잠들고 검은색으로 뒤덮여 있던 세상에서 반짝이는 별만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시트를 접고 몸을 눕힌 후 눈을 감았다. 일출까지 2시간 정도 남아있었기 때문에 잠을 청해 볼 생각이었다. 계획과 달리 쉽게 잠들기 어려웠다. 하기야 나는 원래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데다 굳이 자려고 애쓰는 인간이 아니다 보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에 비해 바깥양반은 옆에서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잘 자고 있었다. 머리만 대면 잠에 드는 사람을 보는 건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일이다. 서울에 두고 온 일들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만의 세상에서 부유하고 있을 때, 하늘의 색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고작 작은 별들만 빛나던 어두운 하늘에 구름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느새 별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구름을 감싼 오렌지색과 파란색을 보자 더 이상 누워있을 이유가 없었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낸 후 휴대전화를 챙기고 조심히 차 문을 열었다.


"어디가?"


차 문 여는 소리에 바깥양반이 잠에서 깼다.


"아... 해 뜨는 것 좀 보고 올게. 자고 있어."

"어. 알았어. 조심히 다녀와."

"차 문은 안에서 잠가."


내가 조심할 건 딱히 없어 보였지만 차 안에 혼자 있을 아내가 조금 걱정되어 문단속 당부를 했다. 잠을 깨운 미안한 마음을 등 뒤로 남겨둔 채 바닷가로 몸을 움직였다. 아주 잠깐의 대화였는데 그 사이 하늘의 색이 달라져 있었다. 마음이 바빠졌다. 시선을 옮기니 갯가에 바위가 보였다. 그곳으로 향했다.


갯바위에 다다르자 바다와 가까운 곳에 이미 사람이 있었다. 조용한 곳이라 나밖에 없을 줄 알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은 어느 곳이나 있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있는 곳이 명당이 아닐까 싶어 노선을 변경했다. 예상이 맞았다. 그곳은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해가 구름뒤로 숨어있는 걸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시선을 120도 정도 돌리면 출항하는 배를(아마도 낚싯배가 아닐까 싶은) 볼 수 있었다. 카메라에 전원을 넣고 셔터를 몇 번 눌렀다. 그곳에 서서 아침 해가 잘 보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5시 45분.

구름 아래에 숨어있던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었다. 동해로 여행 와서 일출을 보는 건 20대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는 정동진에서 아침 해를 봤었다. 생각해 보니 그때도 나 혼자 봤었다. 당시 여자 친구(지금은 바깥양반)와 친구 커플은 모두 차 안에 잠들어 있었다. 사실 일출에 큰 감동을 받거나 하는 유형은 아니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약간 뭉클했다고 해야 할까?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보고 싶어 갯바위를 올랐다. 그저 조금 하늘과 가까워졌을 뿐이었는데 대단히 다른 공간에 있는 듯했다.


셔터를 눌러 기록하는 행위를 잠깐만 했다. 떠오르는 태양을 그냥 바라만 보고 싶었다. 해가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온전히 쳐다보기 힘들어졌다. 선글라스를 챙겨 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런데 거의 그와 동시에 선글라스가 없는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필터를 벗기고 온전히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는 기회란 내 인생에 몇 번 없었으니까.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했다.


거의 20년 만에 만난 일출.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이 광경을 애써 가지려 하지 않을 거다. 언제고 우연히 여행길에 만난다면 그걸로 충분히 행복할 테니까. 그런 마음으로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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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에서 복귀 후 브런치에 접속했다. 미뤄 둔 일 때문에 마음에 여유가 없었지만 윤 작가님이 피사체에 다녀온 글을 보기 위해서였다.


한 달 전이었나? 피사체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쓴 적이 있다. 사진 전문서점에서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특별한 경험을 적은 글이었다. 그걸 보고 관심을 보였던 많은 분 중 '윤' 작가님이 있었다. 그리고 2주 전. 연재 글에 윤 작가님이 댓글을 남겼다. 서울 갔다가 피사체에서 행운을 가득 안고 왔단 이야기였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작가님의 에피소드가 담긴 글이 올라오기만 기다리고 있었기에 휴가가 끝나자마자 글을 보러 달려간 거였다.


글을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졌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작가님이 연재로 마감하는 필력을 과시함에 따라 나의 궁금증은 더욱 미쳐버리고 말았다. 허허... 마침 이번 주 휴가를 마치면 피사체에 가려고 했던 터라 지체하지 않고 다음 날 동묘 앞 역을 찾았다. 피사체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오랜만이라며 잘 지내셨냐는 인사를 건네주셨고 나 역시 사장님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어떻게 지냈는지 근황을 짧게 주고받은 후 사장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셨다.


"작가님 지인분이 최근에 다녀가셨어요!"

"아! 네... 그렇지 않아도 말씀 들었습니다. 하하!"

"지인분이 오셔서...(생략)"


그랬다. 사장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윤 작가님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끊었던 글의 다음 편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스포를 당한 아쉬움도 있었지만 다음 주에 방영될 본편 대본을 나만 먼저 본 것 같아 짜릿함이 더 컸다. 듣기만 해도 정말 대단한 행운이 아니었을까 싶은 일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윤 작가님은 알 수 없는 작가님과 관련된 뒷얘기도 들었다. 이건 정말 나와 사장님만 아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에피소드였다. 하하!


대화를 마치고 새로 들어온 사진집을 보는데 한 책에서 유독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국내 작가의 사진이었는데 그의 깊은 시선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곧이어 마음을 훔쳐 간 사진집이 윤 작가님이 구매한 것과 같음을 알게 되었다. 역시 사람 보는 눈은 비슷한 게 아닐까 싶기도 했고 재밌기도 했다. 총 3개의 사진집 중 하나만 구매할 생각이었는데 나머지 두 권은 일본 작가의 사진집이었다. 결국 결제 테이블에 올려 둔 건 나의 마음을 가장 크게 움직인 이청 작가님의 사진집이었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온라인 인연은 재밌는 구석이 있다. 평소 일상을 담은 글을 읽은 것과 같은 공간에 있었단 이유만으로도 내적 친밀감이 상승하는 경험은 온라인 인연의 가장 큰 매력이다. 자그마한 사진 전문서점. 피사체에 들릴 때마다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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