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엔 봉은사에 다녀왔다. 뜬금없는 고백을 하자면 나는 나이롱 불자다. 요즘 Z세대에게 불교가 뜬다고 하던데 이유가 재밌다. '강요하지 않으니까' 란다. 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 나는 다른 종교를 몰라서 그들이 실제 강요를 하는 건지 어떤지 모르지만 불교를 좋아하는 게 저런 이유라니 재밌게 들렸다. 꼭 종교가 아니더라도 요즘엔 꽤 중요하게 고민해 봐야 하는 삶의 태도가 아닐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돌아보면 나도 그랬다. 타인에게 강요받는 게 싫으면서도 타인에게 강요를 서슴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사실 그 버릇이 아주 고쳐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며 괜찮은 것 중 하나는 좋아하는 걸 더 깊게 사유하며 즐길 수 있기 때문인데 여기에 함정이 하나 있다. 특별히 의식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오래 묵은 나쁜 태도나 가치관이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게 그렇다. 그래서 타인에게 강요를 서슴지 않았던(물론 내 딴에는 그게 좋은 것이라 생각했었다) 것도 항상 특별히 의식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 중 하나다.
결국 주기적으로 마음을 여과하는 게 중요한데 그때마다 절을 찾게 된다. 특히 서울에 있는 절은 도심 속에 있어 뭔가 특별하다. 자동차와 사람으로 가득 찬 속세를 등지고 불가로 들어가면 번뇌로 가득했던 현생은 마치 꿈에나 있었던 것처럼 아득해진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속세에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렇게 오롯이 마음에 가득 찬 불순물을 걸러내는 행위에 집중하는 순간을 만난다. 항상 그렇듯 대웅전을 지나 흙길을 걸으며 마음을 정돈하고 미륵대불 앞에 선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고개를 든다. 높은 하늘과 불상을 바라보면 단 하나도 놓을 수 없을 것 같던 욕심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진다. 그것들은 먼지가 되어 나도 모르는 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물론 나는 안다. 이건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와 같단 걸. 하지만 진짜 약인 줄 알고 좋은 반응이 환자에게 일어나듯 번뇌로 가득 찬 마음도 진짜 사라진다고 믿어보면 어떨까? 때로는 이런 플라시보 효과가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목요일엔 사진 작업을 하러 한강으로 나섰다. 가방엔 카메라 두 대와 카드 지갑과 에어팟만 챙겼다. 작정하고 작업하러 나갈 땐 단출하게 짐을 꾸리는 편이다. 자그마한 카메라 가방은 크로스로 메는데 언제나 왼쪽 방향이다. 셔터를 누를 때 오른손을 쓰기도 하고 나는 오른손잡이니까 가방을 왼쪽에 두어야 편하다.
지난번엔 잠실철교를 건넜지만 이번엔 잠실대교를 건너 한강으로 들어갔다. 아직 초저녁이라 그런지 러너들이 많았다. 사진을 찍으러 나간 거지만 나도 러너니까 그들을 볼 때마다 속으로 응원하곤 한다. 하지만 거짓말 좀 보태서 5초마다 러너들이 내 옆을 스칠 듯 말 듯 지나갈 때면 응원하던 마음도 금방 사그라들고 엉뚱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뛰기엔 봄이나 가을이 제일 좋은데 봄엔 뭐 하다가 왜 더워 죽을 것 같은 여름에 다들 나타나는 걸까?'
생각의 끝은 항상 이런 식이다. '여름엔 왠지 다이어트를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러너들이 늘어나는 것'으로 결론을 내버리고 마는 것. 그들을 인터뷰해 본 적도, 통계를 뒤져본 적도 없으니 당연히 근거가 없는 결론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도 아니니 나름 그럴싸한 논리 같다며 합리화시킨다. 어쨌든 한강에도 러너들이 부쩍 늘어나면서 아슬아슬한 장면을 자주 만나게 된다. 거친 숨을 몰아내며(사실 숨을 쉰다기보단 살기 위한 몸부림 정도로 보인다)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들 정도로 비틀거리면서 달리는 사람은 대부분 눈동자가 풀려있다. 그런 러너를 보면 쓰러지는 건 아닐지 걱정도 되고 그러다 산책하는 사람이나 자전거를 타는 라이더들과 사고가 나는 건 아닐까 하며 쓸데없는 염려까지 하게 된다. 아무튼 나도 러너니까 그런 걱정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한 번 달리기 시작하면 속도를 늦추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니까.
사진을 찍으며(물론 망상도 곁들여 가며) 걷다 보니 1시간이나 지났지만 겨우 올림픽대교 아래였다. 조금 힘들었다. 2시간 넘게 달릴 수 있는 체력이지만 작업을 하며 걷는 건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상당하다. 아마도 관성의 도움을 받아 연속해서 걷는 것보단 가다 서기를 반복해야 하고 때로는 두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셔터를 눌러야 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여름에 스트릿 사진 작업을 하는 건 꽤 단단한 체력과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 이것도 노하우라면 노하우라고 할 수 있을까 싶지만 250ml 소프트 플라스크에(러닝 할 때 사용하는 물통) 물을 채워서 다니는 게 큰 도움이 된다. 왜냐면 한강이나 공원 같은 곳은 필요할 때마다 편의점이 있지 않은 경우도 상당해 그럴 땐 정말 큰 힘이 된다.
어쨌든 지난 목요일엔 소프트 플라스크를 챙기지 않았고(너무 자신만만했다) 물을 마시고 싶어 한강을 당장 벗어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무더위에도 뛰다 걷다를 반복하는 앞의 러너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보다 저 사람이 더 힘들다.
사진을 찍다가 유독 빛이 눈에 밟힐 때가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떨어진 빛이 도드라지면 더욱 그렇게 보이곤 했다. 평소 아무 생각 없이 다니던 길바닥에 빛과 그림자가 생기고 그림자는 캔버스 위를 덮은 흑연이 됐다.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빛이 빛나 보이는 건 그림자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니까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듯 그림자가 없으면 빛은 존재하지 않는 관계 같았다. 빛은 결국 빛으로 존재하기 위해 그림자를 만들어 낸 게 아닐까 싶은 거였다.
언제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된 후부터 그림자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어떤 장면이 눈에 들어오면 꼭 세상을 흑백으로 보곤 했다. 흑과 백.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명확함이 좋았다. 하지만 흑백으로 보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 세상도 분명하지 않은 옅은 검은색이 무한히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색이었다. 흑과 백처럼 명확하지 않은, 정체가 불분명한 존재였다. 하지만 빛이 빛으로 존재하기 위해 그림자가 필요하듯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기 위해선 무한히 존재하는 그것. 즉, 회색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다음부터 나는 회색을 찾게 됐다. 세상을 흑백처럼 어떤 한 쪽으로 치우쳐 보지 않고 무한한 명도의 회색으로 보고 싶어졌다. 흑백 사진에서 명암을 다룰 때 회색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건 어떤 형태로 있는지 분명히 말할 수 없지만 내게 존재할지 모르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과 닮은 거였다.
아직도 나는 회색으로 세상을 보는 걸 멈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