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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 Mar 17. 2024

외향인이 가진 비밀

열한 번째 주, 내향인의 잔존





'내향인 출신의 ENTJ'

주변에는 나를 극 'E' 성향이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외향인의 비중이 크긴 해도 내향인의 면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내향인 성향이 너무 커서 엄마가 태권도 학원에 날 억지로 밀어 넣은 일도 있었다. (관장님에게 아들의 성격 개조를 부탁한 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지금이야 내향인도 나름의 개성으로 존중(?) 받는 시대지만 내가 어릴 땐 소극적인 남자는 살아가면서 여러모로 불리할 수 있단 근거 없는 여론이 지배적인 때였다. 운동도 곧잘 하고 같은 반 친구들과 잘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고쳐야 할 문제로 인식되는 것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자가 소극적이면 안 된다는 엄마의 극성에 굴복한 나는 결국 성격 개조에 착수하게 되었다.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고 낯선 교실엔 다른 초등학교 출신인 J가 아이들 틈에 둘러싸여 있었다. 무리 사이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J는 친구도 많은 데다 말도 재밌게 하는 녀석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사이에 끼워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직 성격 개조가 덜 된 탓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귀만 열어두었다. 2교시 쉬는 시간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J의 친구라 생각했던 애들이 사실은 모두 그날 처음 본 사이였던 것이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큰 충격이었다. 처음 본 사람을 몇 년을 알고 지낸 절친처럼 대하는 J의 능력이 너무나도 탐났다. 그때 결심했다. J의 능력을 흡수하기로. 소극적인 성향인 나에게 J는 그렇게 롤모델이 되었다. J를 관찰하고 그가 하는 데로 순서를 정해 따라 해 보기로 했다. 


[J의 비법]

1. 처음 보는 아이한테 이름 부르며 먼저 인사하기. 

2. 인사할 때 절대 어색해하지 않기. 미소는 필수.

3. 1번과 2번 반복하기. 


J 따라 하기 프로젝트는 대성공이었다. 그렇게 그를 열심히 따라 한 덕분에 2학년이 되자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핵인싸가 되어 있었다. 한번 인싸의 삶을 맛보고 나니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덧 '윤기'는 자타가 공인하는 외향인이 되어버렸다.






'내향인의 잔존'

외향인으로서의 삶을 즐기며 살아가던 중이었다. 'E' 성향을 현란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이 되니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도 유쾌하게 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성격 때문에 빠른 기간 내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자면 그건 섣부른 오해였다. 부담을 느꼈던 거다. 나에게 친구라는 것은 '친밀감'이 쌓일 정도의 높은 허들을 넘어야 가능한 것이며(아! 물론 내가 그렇다는 것이지 다른 방식의 정의도 존중한다.) 내 영역에 들어왔다는 특별한 의미기도 했기 때문이다. 


친밀감을 쌓으려면 우선 상대에게 흥미를 느껴야 하고 대화 코드가 맞아야 하는 건 기본이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나이, 성별, 직업, 재력 등 어떠한 배경도 무시하고 순수하게 인간 대 인간으로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이것이 친밀감을 쌓기 위한 첫 번째 요소다. 이 단계를 넘어 시간을 쌓다 보면 비로소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와 감정을 공유할 때가 오기 마련인데, 이때 얼마나 진심인가가 중요하다. 진심을 기준으로 친밀감의 크기를 판단한다.(빈도수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친구가 되기 전 친밀감을 쌓는 과정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꽤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고단한 과정이다. 이것은 쉽게 사람을 받아들이기 힘든 내향인의 잔존이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곁에 남아 영향력을 뿜어내는 내향인의 존재감. 이것이 언제나 반가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지만은 않다.






'지키고 싶은 벽'

글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노력 덕분에(진짜 엄청나게 노력했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외향인의 삶을 살고 있지만, 아직 남아있는 내향인의 잔존을 '친밀감의 벽'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 높은 벽은 친구와 지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과 동시에 타인에게 언제 받을지 모르는 상처를 사전에 검토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외향인으로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없어질 거라 생각했던 이 벽은 시간이 지나며 도리어 강건해진 느낌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에겐 아직 이 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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