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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 Mar 31. 2024

사진, 불시에 찾아오는 행복

열세 번째 주, 시간여행




이번 주, 사진을 가득 모아둔 폴더를 열어봐야 할 일이 있었다. 오래된 사진을 열람하는 것은 단순히 저장해 둔 자료를 찾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진 한 장엔 그 시대에 살았던 내가 있고, 가족, 친구, 장소가 있다. 지금 보기엔 다소 어색한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며 세포 하나하나가 반응할 때 비로소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이 촌스러운 스타일은 뭐람'


풋풋했던 20대 시절. 한껏 멋을 부리고 다녔다. 그런데 지금 보기엔 헤어스타일이 왜 저 모양인 걸까? 옷은 또 왜 저렇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사진 속의 모습을 누가 볼까 봐 뒤를 두리번거려 본다.


"그래. 그때만 해도 저게 최고 유행이었다고!!"


당시 폰카는 화질도 좋지 않아 자체 뽀샤시 필터가 먹여진 상태인데도 지금보다 얼굴이 훨씬 까매 보인다.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축구를 해서 그런가 보다. 20대 때의 나는 조금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잘생겼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제 보니 끔찍한 과거미화였다. 최근에 사귄 친구들에게 풋풋했던 옛 모습을 보여주려 했지만 취소다.(미리 말하지 않길 잘했다.) 풋풋은커녕 촌스럽다. 이런 건 나만 간직하는 걸로. 하하.






'마음이 여렸던 친구'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어쩌면 애써 찾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는 친구의 모습이 보인다. 주름이 깊게 페인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우정을 나눌 거라 생각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마음이 여린 친구였다. 그에게 이 사회는 너무 냉혹했고, 이겨내지 못하는 친구의 모습을 나는 답답해했다. 나에게 많은 도움을 청했고, 언제고 서슴없이 그의 부탁에 응했지만 그때마다 상냥함보단 뼈 때리는 말로 친구에게 자극을 주려 했었다. 어릴 땐 그게 동기부여가 될 거라 생각했고 친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가 고향인 서울을 떠나 부모님의 고향으로 내려갈 때만이라도 다정한 안부 인사를 건네었으면 좋았을걸.


그 여린 친구가 사진 속에 미소 짓고 있다. 마음이 아프다. 그때도 친구는 힘든 일이 많았고 걱정이 가득했다.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의 모습처럼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 잘 지내고 있을 거다. 지금까지 친구에게 연락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그때의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참 좋아했던 샌드위치 집'


2000년 대 중반 가로수길에 자주 가던 샌드위치 집이 있었다. 지금은 흔해빠졌지만 치아바타로 샌드위치를 만들어주던 집은 당시엔 그 가게뿐이었다.(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렇다.) 매장 인테리어도 좋았지만 맛은 더 좋아서 당시 여자친구와 자주 데이트 했던 곳이다. 내부가 협소해 웨이팅은 기본이었지만 발레 파킹이 되어 편했던 기억이 있다. 이제는 갈 수 없어 아쉬운 장소다.


폴더를 열어보니 그곳에서 많은 사진을 찍었다. 가게 안을 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음식사진이나 매장사진은 보이지 않고 배경을 포커스 아웃한 여자친구 사진만 가득했다.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서 볼 수 있겠지만 그런 거 말고 내가 찍었던 사진을 보고 싶었다. 그래야만 그 시절의 감성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때로는 사람이 아닌 장소가 그리울 때가 있다. 요즘엔 장소를 찍는 걸 게을리하지 않지만 그때는 그저 사람만 중요하다 생각했었나 보다.






'카메라의 속도차이'


어릴 때부터 사진을 취미로 하다 보니 필름 사진이 제법 있다. 기억에는 2000년 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디지털카메라 시장이 열린 것 같은데, 2000년 대 중후반에는 다시 필름 사진 열풍이 분적이 있었다. 마치 최근에 레트로 문화가 유행한 것과 비슷하다.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결과물을 보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해서 눈으로 확인하기까지의 절차와 장소 때문이다. 반면 디지털카메라는 사진을 찍고 화면에서 결과물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필름카메라와 비교하면 속도와 화질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장점이다.


디지털카메라가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화질이 좋아지다 보니 10년 단위로 사진을 보면 체감이 확 느껴진다. 마치 신형 TV가 더 선명한 영상을 보여줄 때의 기분과 비슷하달까. 가전제품에겐 환영할 일이지만 사진에게서 마저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전히 묵묵하게 그 자리에 있는 필름 사진이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애초에 필요했던 사진은 단 몇 분 만에 발견했지만 차마 그대로 창을 닫을 수 없었다. 폴더에 마킹해 둔 날짜와 인물, 장소. 많은 파일을 하나하나 클릭할 때마다 시간여행에 빠져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물품이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지나온 시간 사이사이에 기억하는, 혹은 추억하는 그때가 미화될 수 있고 왜곡될 수도 있지만 사진과 함께하는 시간여행은 언제나 행복한 미소를 품은 채 돌아오게 만든다.


사진이 없었다면, 불시에 찾아오는 시간여행이 가능했을까.



<08년 4월 죽전역에서 필카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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