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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 Mar 24. 2024

공포, 번아웃

열두 번째 주, 마주해야 할 감정



이번 주 독서 모임에서 각자 겪고 있는 공포에 대해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공포? 글쎄. 어릴 때부터 소름 돋게 싫어했던 귀신이나 바퀴벌레가 떠오를 뿐 딱히 그것에 대해 생각나는 건 없었다. 하지만 모임에 참여한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갑자기 한 단어가 떠올랐다.


'번아웃'


잊고 있었다. 번아웃이라는 것에 대한 공포를. 아니 어쩌면 잊고 싶어서,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애써 외면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약 10년 전의 나는 워커홀릭이었다. (지금이랑은 다른 일을 할 때다.) 내가 꿈꾸던 일을 하게 돼서였기도 했고, 그것이 실제로 너무 재밌어서였기도 했다. 마치 그 일을 할 때만큼은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른 사람이라기보다, 일을 사랑하는 또 다른 나의(동경하던 모습) 등장이 마냥 행복하고 즐거웠다. 성공을 한다면 반드시 꿈꾸던 일로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잠을 줄이고, 취미나 일 외의 사람을 만나는 것은 죄다 후순위에 두어야만 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불타오르는 열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가였다. 그때는 그런 걸 알지 못했다. 그런 조언을 해줄 사람도 마땅치 않았고, 누가 해줬다 한들 내가 새겨 들었을지 조차 의문이다. 


더는 할 수 없었다. 몸보다 마음이 더 지쳐있었다. 순수하게 일 자체만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도 일하는 순간만큼은 고통 없이 행복했으니까. 문제는 일을 마치고 벌어지는 인간관계에서였다. 억울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이를 변호하는 과정에선 어김없이 상명하복이 등장하는 문화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들에겐 논리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나보다 상급자인 게 중요했을 뿐. 결국 매번 커다란 벽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내 존재의 무기력함이 날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후배들은 두세 달이면 새로운 얼굴로 바뀌곤 했다. 참을성 없기로는 세상 서러울 정도로 소문나있던 나보다 더 참을성이 없던 그들을 보며 답답하기도 했지만 막상 그들이 떠나는 날 소주 한잔 나눌 때면 누구보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꿈을 위해 이곳에 왔는데 어느새 꿈이 날 갉아먹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중학교 때부터 함께한 친구가 술잔을 기울이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나보고 너무 이상해졌다며 다른 사람이 됐다는 말을 했다. 죽마고우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충격이 컸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어느 날, 한강에 앉아 꿈과 함께한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쉼 없이 달렸었다. 나는 그게 성공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 생각했고 올바른 태도라 여겼다. 틀렸었다. 열정과 성취감을 돌보지 않은 대가는 육체와 정신이 모두 소진되는 것이었다. 번아웃이 왔다고 자체 진단을 내렸다. 번아웃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제발 여기서 멈춰야 한다고 내 안의 다른 내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4년을 넘게, 햇수로는 5년 차에 그곳을 떠났다. 소중했던 꿈도 그곳에 남겨둔 채. 실패한 아들의 모습을 보이는 게 너무 죄스러워 부모님 앞에서 한 시간을 펑펑 울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지금의 일을 시작하면서 기준을 세웠다. 업무량은 지치지 않을 만큼 조절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 일하기로. 그때의 인간관계나 번아웃이 왔던 것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잊은 적은 없어도 극복하는 방식에 허점이 있었다.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두려움 자체를 극복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피하기만 했을 뿐.


모임에 참여한 분들이, 겪고 있는 공포를 담담하게 이야기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다지 공포처럼 느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 공포의 크기가 작아서라기보다 그들은 공포를 똑바로 마주하며 살았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번아웃이 올 만한 상황을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 번아웃의 공포를 용기 있게 마주 할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앞으로 이 공포와 얼마나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을까. 숙제가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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