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번째 주, 느닷없이 찾아오는 감정들
하루에도 적게는 몇 번, 많게는 수십 번씩 다양한 감정을 만나고 보내며, 마음이 더해지기도 소비되기도 하는 경험을 하곤 한다. 언제나 품고 있던 감정조차, 느닷없이 찾아온 여름처럼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익숙함과 놀라움, 그 어딘가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신비로움. 이번 주 그런 날이 찾아왔다.
얼마 만인지도 기억이 희미하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 때쯤 하늘공원 정상에 도착했다. 아직 발목과 무릎 사이 정도밖에 자라지 않은 어린 억새가 보인다. 갈색이 아닌 푸른색이 어색하게 느껴지던 것도 잠시, 더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단 마음이 들 정도로 지금 이 정도의 녹색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일기예보 아나운서는 분명 더위가 한풀 꺾였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양팔이 훤히 드러난 티셔츠 위로 뭘 더 걸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공원까지 걸어오는 20분 남짓한 오르막길이 몸의 온도를 조금 더 올렸을 테지만 그래도 너무 이른 더위였다. 보편적인 이미지만큼 영글지 않은 억새, 급하게 마중 나온 더위, 요즘 내 마음처럼 뿌연 하늘. 이것들의 조합을 맞추다 보니, 공원을 올라올 때 옆으로 지나갔던 셔틀에 부러움을 느낄 새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적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사람이 많지 않은 공원의 모습이 낯설기는커녕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단 생각이 들었다.
억새 사이로 잘 정비된 공원길을 걸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앉고 싶은 곳마다 마침 자리가 없다. 암묵적으로 정해진 것 같은 그들의 거리 두기를 굳이 침범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 곳에 앉고 싶지는 않아 걸어온 길을 뒤 돌아봤다. 앞만 보며 사는 것에 익숙해서 그런지 지나온 길이지만 새로운 길처럼 느껴진다. 그 길을 따라 공원 주변에 자리 잡은 벤치로 향했다. 역시나 명당엔 이미 사람이 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만한 장소를 찾아 공원 울타리 밖의 세상을 바라봤다. 한강이 보인다. 내가 사랑하는 한강. 위에서 내려다본 한강의 맛은 사뭇 달랐다. 강변북로와 월드컵대교 위에 놓인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보였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벤치를 등 뒤에 두고 한참을 서서 한강과 마주했다. 하류에서 더 하류로 흐르는 강물의 모습이 마치 지금의 내 처지와 같이 느껴졌다. 자외선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던 옅은 갈색 안경을 벗었다. 하늘의 색이 변하고 있다. 흐릿한 하늘에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하던 구름이 솜사탕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오렌지부터 연한 보라색까지 몇 가지 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색이 겹친 하늘이었다. 살면서 처음 보는 장면도 아닌데, 재빠르게 뒷주머니에 있던 폰으로 손을 보냈다. 오늘은 처음 봤으니까, 솜사탕 하늘을 디지털 기계에 담았다.
해가 지고 어둑해진 공원. 이제야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주고받는 말이 무르익을 때였다. 이제 내려가야 한단 공원 관리자 아저씨의 묵직한 음성은 잠자던 이성을 깨울 만큼 타격감이 상당했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벌써 8시가 되었다고?' 다시 도시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올라왔을 때 걸었던 공원 길에선 개구리 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한 일이다. 그저 소리만 들었는데도, 초등학교 때 걷던 시골 외갓집 논두렁 길이 떠올랐다. 덕분에 두 해전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머리부터 마음까지 잠시 스쳐 갔다.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올라오는 길에 봤던 양옆의 듬직한 나무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가로등 불 하나 없는 길에 서 있었다. 바람과 가까워진 나무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공포영화의 클라이맥스 신을 방불케 했다. '이 길을 20분이나 가야 한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솜사탕만 담아서 내려오는 건데...' 몽글몽글한 감성에 푹 빠져 집에 갈 생각조차 잊었던 게 조금 전인데 고작 30분 차이로 행복과 공포가 교차하는 건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무사히 공원에서 내려온 후,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폰을 꺼내 사진을 다시 바라봤다. 삭막한 도시로 돌아온 것도 서러운데 오늘의 감정을 공포체험으로 마무리할 순 없었다. 감정을 1시간 전으로 돌려놓았을 때쯤. 솜사탕 사진은 몇 마디와 함께 '무보정 하늘색'임을 강조한 블로그 포스팅에서 소비되었다. 며칠 후 인스타에서도 소비될 테고, 브런치 글에서도 소비될 테지만 아쉽지 않았다. 하늘공원에서의 시간은 그 어떤 곳보다 내 마음에서 오래 남아 있을 테니까.
24년 4월의 마지막 날. 하늘공원에서 만난 감정들은 이렇게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