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길 위 학교 에피소드 1
가을이 지기 전 11월 초순! 3박 4일 지리산 둘레길과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 길 위 학교를 떠났다. 나는 체력이 좋고 둘레길 경험이 많은 재욱 선생님, 날씬하고 체력 좋은 경석이, 많이 걷게 해 주고 싶은 현태와 한 조가 되었다.
첫째 날! 차량으로 2시간가량 이동하는 내내 창밖의 황홀한 가을 풍경을 외면하고 핫스폿 연결하여 휴대폰 게임에 몰입하는 아이들! 이 좋은 경치를 놔두고 휴대폰에 몰입하는 아이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 좋다. 오늘은 첫날이니 무리하지 말자, 그냥 놓아두자, 속으로 다짐한다.
도착하여 남원에서 점심을 먹고 지리산 둘레길 1코스 주천에서 시작하여 운봉까지 걷는다. 두 아이 걷는 속도가 제법 차이 난다. 경석이는 자신을 에이스라고 부르며 스포츠카처럼 속도를 내고 싶어 하였고, 현태는 기침에 숨 가쁜 호흡에 수다에 완전 느림보 거북이가 따로 없다. 경석이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씩씩거리며 18! 18! 한다.
"에이스만 모아 놓은 조라며? 뭐가 에이스야. 에잇! 18! 짜증 나. 왜 이렇게 늦게 와. 존나 못 걷네."
출발 전 사례담당 선생님이 경석이의 참여를 유도하고 동기부여하기 위해 에이스만 모인 조에 편성되었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헐! 자신이 들은 말과 현실과의 괴리에서 분출되는 경석이의 짜증과 분노, 욕설은 온전히 나와 재욱 선생님의 몫이었다.
우리 걸음은 가다 서다를, 당일 날씨는 비가 오다 햇볕 나다를, 나와 재욱 선생님의 감정은 끓어오르다 가라앉다를 수차례 반복했다. 초코바, 홍삼양갱, 말랑카우! 이렇게 훌륭한 식품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겁난다. 아이들이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다가도 달콤한 간식을 나눠 먹으면 한 바닥 가라앉는 게 참 신기했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은 어른보다 단순하고 순수하다. 아무튼 그러한 반복 반복 끝에 드디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목적지인 운봉에 도착했다. 오 하느님! 할렐루야! 이렇게 무사히 하루가 마쳐지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 때, 웬걸 아직 안 끝났다는 신호가 들렸다.
"밥 빨리 먹고 숙소 가요. 숙소 몇 시에 도착해요?"
"응. 저녁 먹고 숙고 도착하면 아무리 늦어도 8시는 넘지 않을 거야."
"8시요? 너무 늦는데... 노트북은요?"
"노트북? 무슨 노트북?"
"장흠 선생님한테 말했는데, 차에 안 실었어요?
목소리에 짜증이 곱빼기로 묻어난다. 내 생각엔 8시에 숙소 도착하면 씻고 11시까지 충분히 쉬면서 휴대폰 할 수 있는데,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간다. 노트북은 또 뭐람? 나중에 듣고 보니, 경석이가 하는 인터넷 게임이 있는데 매일 인터넷으로 접속해서 출석해야 그 세계에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매일 1시간 이상씩 접속하여 활동해야 레벨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야! 아무리 게임이 좋아도 무슨 지리산 길 위 학교까지 와서 그걸 해야 하나' 싶었다. 사전에 상의도 없이 그걸 허락해준 담당 선생님한테도 짜증이 확 올라왔다.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으니, 경석이의 태도가 틀렸다는 생각이 들고 걷는 내내 경석이의 짜증을 받아내느라 눌러 놓았던 감정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술 더 뜬다.
"오늘 휴대폰 내가 갖고 잘 거예요."
"응? 휴대폰 갖고 잔다니 무슨 말이야?"
"여긴 쉼터가 아니니까 잘 때 안 내도 되잖아요."
헐! 이건 또 무슨 해괴한 논리란 말인가. 차근차근 설명한다.
"여기는 쉼터는 아니지만, 쉼터에서 온 거잖아. 내일 일찍 일어나서 또 걸어야 하니까 쉼터에서 하듯이 11시에 휴대폰 내고 잘 거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석이가 말로 한 대 내지른다.
"나 밥 안 먹을래요. 짜증 나서 밥 못 먹겠어요."
"경석아! 짜증 나는 기분은 알겠는데, 그래도 저녁은 먹자. 있다가 숙소에 가면 배고파서 어떻게 잘래?"
"안 먹는다니까요. (들릴 듯 말 듯 고개를 돌리며) 존나 짜증 나. 이 씨."
길게 몇 차례 호흡하며 감정을 겨우 추스르고 말한다.
"알았어. 우리 들어가서 밥 먹을 건데, 안 먹어도 같이 들어가자. 날씨가 춥다. 감기 걸리면 어떡해."
"싫어요. 그냥 밖에 있을래요."
다시 길게 호흡! 호흡! 호흡! 알았다고 하고 마음 불편한 채로 셋이 중국집에 밥 먹으러 들어갔다.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식당 문을 열고 경석이가 묻는다.
"나 어디에서 있어요?"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같이 들어가자 할 때는 밖에 있는다 하더니, 갑자기 자기가 어디 있어야 하는지를 왜 나한테 묻나. 달갑지 않았지만 추위에 덜덜 떠는 모습이 안쓰러워 들어와 기다리라고 했다. 마음 불편해서 다른 자리에 앉을 줄 알았더니 성큼 걸어와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 앉는다. 들어왔으니 같이 밥 먹자 했더니, 그래도 자기는 안 먹겠단다. 어휴! 이 놈의 똥 고집쟁이! 물론 속으로만!
탕수육이 나왔다. 안 먹겠지만 도의상 한 번 더 물었다. 같이 먹자고. 그런데 왠 걸 탕수육을 먹겠단다. 얄밉지만 안도감이 드는 복잡 미묘하고 불일치적인 이 감정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부먹? 찍먹?" 모두가 합의하여 부먹으로 결정. 다행히 소스를 수북이 부은 탕수육을 맛있게 먹는다. 그것만 먹고 숙소 가면 분명 배고파서 또 짜증 낼 텐데.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나를 낮춰 한 번 더 권한다.
"경석아! 아까 짜증이 났니?"
"선생님이 휴대폰을 뺐는다 하니까 11시까지 하고 충전시키고 잘려고 했는데 짜증이 났어요."
속으로 '내가? 언제?' 반박하여 내용을 바로잡고 싶은 충동이 턱 밑까지 올라왔지만, 시시비비를 따져 무엇하랴. 지금은 경석이를 저녁 먹이고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지 않은가.
"그래. 선생님이 설명을 잘 못한 부분이 있나 보다. 네가 듣기에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겠다. 우리 대화에 뭔가 오해가 좀 있었던 것 같네. 오늘 밤 휴대폰을 뺐는 게 아니라 11시까지 충분히 하고 충전하고 자는 걸로 그렇게 이해했다는 거지?"
"네. 제가 11시까지 하고 제 옆에 충전시키고 잘 거예요. 11시 넘어서까지 휴대폰을 한다는 말은 아니구요."
"그래. 그래. 그러면 되지. 맞아. 탕수육만 먹으면 배고프니까 식사 하나 시켜서 먹자."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는 탕수육만 먹어도 돼요."
"(경석이의 등을 토닥이며) 아니야. 있다 배고플 거야. 조금 기다릴 테니까 주문해서 먹자. 뭘로 먹을래?"
"음. 짜장면 곱빼기요."
그렇게 첫째 날 수많은 짜증과 다독임의 고개를 넘어 우리는 배부른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가 평온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