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mileall Jun 01. 2020

친구를 사람을,,,

인간관계, 사람 냄새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고 그즈음 피트니스 대표가 바뀌어 다니던 피트니스가 공사에 들어갔습니다.

운동을 매일 하던 사람들에겐 피트니스 폐업은 고통입니다.

그래도 개인이 소셜 디스턴싱만이라도 실천하여 코로나를 이겨내야 하므로 우리는 2월부터 거의 매일 각자 집에서 보냈지요.


4월 말 경 코로나가 잠잠해지는 듯하여 모두가 기뻤습니다. 갇힌 생활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5월 초부터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그냥 여행 등등


이전 저런 이유로 사람들은 오랜만에 콧바람을 쐬었지요. 저마다 신나게.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A와 B가 연락을 했습니다. 만나서 밥을 먹자고요.


여러 모임에서 개성 있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인간관계 조절 능력이 어느 정도 생긴 줄 알았습니다. 아니, 강화된 줄 알았지요.

그런데, 그래도 망설여지는 건 왜일까요. 고작 밥 먹는 것일 뿐인데요...




이렇게 망설이는 이유는 뭘까요.


첫 만남 후 A는 이유는 밝히지 않고 그만 보기를 원했지요. 그날 너무나 사적인 얘기를 우리에게 해 버려서일까요. A는 지극히 사적인 비밀 얘기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만 터트려 버렸습니다. 모두가 당황했어요. 맛있게 먹던 밥도, 재밌게 나누던 대화도 일시 정지해 버렸죠. 그만큼 극히, 아주 사적인 얘기였습니다. 웃으며 즐겁던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편안했던 마음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아마도 미국이 러시아에게 받았던 스푸트니크 충격(sputnik crisis)이 이 정도였지 않았을까요.


두 번째 만남에서는 B와 C가 설전을 벌였습니다. 만나자마자 C는 자신이 연루된 사건의 진상을 B에게 사실적으로 자세히 설명했지요. 하지만 B는 지속적으로 C에게 반감을 표시했습니다. 그래도 C는 연이어 계속 설명했습니다. B는 C의 그 어떤 설명에도 끝까지 C의 정당한 요소를 조금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C가 잘못한 것이라는 표정에다 오히려 C의 상한 감정을 무시하며 다툰 상대편이 옳다며 지지하기까지 했습니다. C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고 얼굴엔 불쾌함이 역력해졌습니다.

끝날 기미가 없고 미궁으로 빠질 얘기로 그날 분위기가 ‘차악가라앉았지요.

무언의 대중 두 명은 그 사건 얘기를 그만하길 바랐지만요. B와 C가 해답 없는 대화를 계속하며 그날 모임 분위기를 흐리는 걸 그만하길 바랐지요. 그날 모임 취지에 맞춰 C 생일을 축하해 주길 바랐지요. 모두가 즐겁게 생일 파티를 즐기길 원했지만 바람은 어디론가 훅 날아가 버리고 B와 C의 설전은 더 거세졌습니다.

그날로 이미 B와 C의 관계는 완전히 끝난 거였습니다. 손바닥으로 어찌 하늘을 가리겠습니까.

그 사건은 A와 B, 그리고 저는 현장 목격을 하지 못한 일인 데다, 우리 세 명은 자세한 (실제) 내막을 모르는 제삼자이지요. 그러므로 가타부타 뭐라고 추가로 논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날은 C 생일을 축하하러 모인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였는데... B는 계속 버티며 C의 불편한 감정은 아랑곳없이, 조금도 헤아리지 않고 그 사건의 상대방을 계속 변호했습니다. B는 끝까지 사건 상대방 편임을 밝히는 태도를 고수했습니다. C는 알아차리지 못했고 B는 그렇게 고집부리며 그날 모임의 성질을 완전히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B는 C와 1시간 이상이나 한참 실랑이를 벌이며 얘기하던 차에 모임 마지막에 가서는 돌연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 어느 편도 아닌 듯 희미하게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서로가 나눈 대화인데 갑자기 “실은 난 오늘 한 얘기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라는 멘트를 대화 중에 등장시켰어요. 바로 당일 1시간 전에 자신이  한 얘기가 기억나지 않는다면서요. (누가 믿어줄까요.) 그런 엉뚱한 말을 하다니. C의 자존심을 확 무너트리면서 모임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며 상대방 편을 고수하더니, 결국엔 자신이 뭐든 잘 기억 못 한다며, 이도 저도 아닌 척하며 C와의 관계를 애매한 상태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마침내 B는 자신의 속내는 상대방 편이지만 그 속내를 감춘 채 겉으로는 바꿔치기 인간관계를 엉키게 형성할 수도 있다는 복선을 깔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선, 어느 쪽이든 확실하게 노선을 밝히지 않으면 결국엔 혼자입니다. 모두와 가볍게 친하려는 사람은 결국엔 혼자이지요.


제대로 들어야 문맥에 따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텐데... 그래야 소통이 되고 이해가 텐데요… 듣지 않으면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것과 같은 인생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겉으로는 문제 발생을 피하기 위해, 또는 상대가 자신을 싫어하는 걸 외면하기 위해, 또는 자신이 상대를 싫어하는 걸 감추기 위해 오히려 지나치게 칭찬(아부)하며 친한 척하거나 맞춰 주는 척합니다. 그 때문에 의식하지 않고 보면 반대로 친할 걸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행동한들 타인 눈엔 다 보이는 법이거늘요...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보이는 사람 눈엔 다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요.

원래 감추려 하면 할수록 타인 눈엔 더 명확하고 선명하게, 환히 보이는 법이거늘요.

속이 중요합니다. 겉으로 친한 척 맞춰주는 건 공허할 뿐이지요. 지나친 칭찬은 친하기 싫은 사람에게 신경 쓰기 싫어서 가리는 태도입니다. 다가오는 걸 막는 행위지요.


속이 알찬 관계가 사람 마음을 든든하게 하고 오래 지속됩니다.


B가 보여 준 끈질긴 반감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오래전부터 C가 싫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C가 싫고 B에게 있어 C는 무조건 불편한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싫을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지만, 왠지는 몰라도 B는 C의 말은 무조건 무시했고 A의 말은 무조건 수용해 줬습니다.

이것은 ‘언젠가는 B가 A의 말도 무조건 무시하게 될 테고, C의 말은 하늘이 두 조각나도 받아 줄 수 없거나 어쩌면 생존의 위협을 느낄 때는  가식적으로나마 조금은 받아주는 척할 수도 있다.'는 암시입니다.


한마디로 “오늘의 아군이 내일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희박하겠지만 적이 허울뿐인 아군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행여 적이 아군이 되어도 그런 아군은 잠시일 뿐입니다. 필요에 의해 또는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가면을 쓴 채 날카로운 이빨을 숨긴 채 잠시일 뿐이지요.


본래 성질은 바뀌지 않는 법입니다.

본심은 원래 그대로이지요.


C의 생일 파티였던 두 번째 만남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만 보기로 했습니다. 그만 보기로 모두가 유쾌하게 합의했으므로 그 이후엔 예전처럼 피트니스에서 만나 즐겁게 운동만 하면 되는 거였지요. 피트니스 밖에서 사적 만남을 가지면 어떻게 될지 이미 모두 짐작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점점 더 불편해지고 점점 더 불쾌해지는 일들이 암암리에 생기고 있었기예요.


그만 보기로 한 후 피트니스는 공사를 시작했고 한국에도 코로나가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생활 속 거리 두기의 실천으로 모두가 지루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요. 그러다 선거도 끝났고 코로나도 좀 잠잠해지는 듯하니, A와 B는 즐겁고 신난 어투로 만나자는 톡을 올렸습니다.


‘우린 그만 보기로 했었는데요...’


적당한 거리를 둘까요.

대놓고 말할까요.

다른 언니가 좋은 게 좋은 거랬지요.


‘인간관계는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법이니 태도가 바뀔 기회를 주자.’ 할 수 있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만남이 고팠기도 했고, 인간은 망각의 동물 이어서일까요. 밥 먹자는 톡이 또다시 왔을 때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모두 예스를 외치며 우리는 만났습니. 어쨌든 그동안의 회포를 풀자고 하면서요.


역시나 충돌과 기쁨이 교차한 만남이었지만 집에만 있는 것보단 좋았잖아 했습니다. 하지만, 찜찜했지요.




어느 날, B가 제의했습니다. 피트니스 재오픈 전에 2주간 다이어트 댄스를 매일 연습하자고요. 번개 만남으로 우연히 회포를 푼 후에 제의했지요. 취지는 참 좋았고 C도 랫슨해 주겠다고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C는 자신의 개인 일정도 있었고, 아픈 곳이 많아서 늘 병원도 예약되어 있었지만 가능하다고 해서 어쨌든 우리는 함께 연습을 시작했습니.

그런데 연습을 제의했던 B가 우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연습 두 번만에 일방적으로 갑자기 그만하자고 했습니다.

여하튼, ‘뒷간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 더니, 연습하자고 제의할 때는 강경하게 추진하더니, 연습을 그만하고 싶어 지니 B는 우리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불쑥, 연습을 그만한다는 일방적인 통보만 톡에 남겼습니다. 느닷없이 코로나 핑계를 대면서요. 연습을 처음 시작할 시기에도 이태원 관련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었고, 우리 도시의 확진자가 3명일 때도 있었고 1명일 때도 있었지만 우리는 꿋꿋이 연습을 했었는데 말입니다.

필요할 땐 먼저 강하게 제의하고 자신이 필요 없어지니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B를 그래도 ‘그럴 수 있어. 그럴 수도 있지 뭐.’하고 이해했습니다. B의 본모습을 모르니까요. B와 먼저 알고 지내던 A와 C도 그들끼리 서로 매끄럽지 않은 상황일 때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스쳐 지나쳤고 그냥 넘겨 버렸으니까요.

‘그래, 뭐, 그냥 받아들이고 그냥 지나가자는 분위기잖아.’
책임지기 싫어, 노력하기 싫어서 대충 회피하는 시대에 ‘모든 게 가볍고 사소하고 귀찮을 때도 있을 수 있잖아.’ 하며 그냥 지나가기로 했습니.


어찌 되었든 는 C가 수고한 것에 대해 감사 의미로 C와 밥을 먹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또 불쑥, 그다음 날 B도 함께 밥을 먹겠다고 했습니다. B와 A는 불참의 의사를 이미 밝혔으면서 말이지요. 이때 A도 이상했습니다. 그동안 자기주장을 전혀 하지 않던 A였지요.

B가 연습을 그만하자고 했을 때, A는 곧바로 B를 따라서 그만하자고 응답하더니, B가 밥을 함께 먹겠다고 번복하니 이번에도 곧바로 따라서 같이 먹겠다고 톡을 남겼습니다. A는 다른 곳에서 봤을 땐 판단력이 있고 정의로운 사람으로 보였는데 여기서는 이상했습니다. B를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사연이 있나, 약점이라도 잡혔나. 자신 의견이나 입장이 전혀 없다니... 안타깝지만 누군가를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병이 있거나 특히 B를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어떤 사연이 있나 보구나, 했습니다.

헛웃음, 쓴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아야 하는구나.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B는 또다시 말을 바꾸어 밥을 먹지 않겠다는 말을 발사했습니다.

아무런 의논도 없이.

아무런 양의도 없이.

이에 곧바로 B를 따라서 A도 또다시, 조금의 시간차도 없이 곧바로 밥을 먹지 않겠다고 톡을 남겼습니다.

묵묵했던 C도 이번에는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을 했지요.

"글쎄, B도 B지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 A가 그 격이지 않니?”

이 말을 들으니 깨달음의 의문이 몰려왔습니다.

가 선하다고 믿고 있던 ‘A가 겉으로는 위하여 주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뒤에서 해하고 헐뜯는 사람이었나.’???

그래, 변심하여 밥을 같이 먹지 않는 건 괜찮아요. 본인이 타인의 약속에 들어온 상황이니, 의사를 밝힌 후 상대방이 톡을 읽을 때까지만 기다렸다가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답한 후에 마무리하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 세 명이 톡을 읽고 답할 때까지는 예의 있게 기다려야 하지요. 기다리는 것도 싫다면, 아니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라면, 톡을 읽지 않은 사람이나 답이 없는 사람에게 전화해서 미리 확실히 알려 주기만 하면 됩니다. 예약을 변경해야 하기 때문에요.


모른 채 그저 시간이 흘러가지 않게 하는 것, 그것 또한 해결입니다.


C는 자기 의사만 밝힌 후, 그냥 톡을 나가버리는 문장을 남기고 그렇게 끝내버리는 성격이었구나.’

‘지극히 본능적인 사람인가.’


   만약 당신이 나처럼 개개인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관대하게 이타적으로 협력하는 사회를 만들기를 원한다면 생물학적 본성으로부터 기대할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경고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쳐 보자._리처드 도킨스


이기적으로 태어났지만 우리의 유전자가 ‘이기적 행동을 하라고 지시하여도 전 생애 동안 반드시 그 유전자에 복종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 인간은 교육을 받습니다. 관대하고 이타적인 부분을 적절히 발휘하기 위해서 말이에요.




B는 매너 없는 행동을 하고도 모른다고 한다.

모르면 본인만 손해다.


위대한 진리도 아니고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에 대해서 모른다고 말하다니, 모른다고 말하여도 모르는 게 아닌 것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모두가 말하는 걸 피했을 뿐이지 B 잘못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모른다는 사실은 사라지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 자리에서 바로 언급했지만 B는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며 부인했다.


실력, 재력, 학력 그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 제일 중시해야 하는 건 뭘까.


무례한 행동에 대해 우선 랫슨해 준 언니에게 사과하길 바랐다. 다행히도 사과하길 바라는 내 의사에 B가 C에게 사과했다는 톡이 그다음 날 들어왔다. 참 다행이었다. 내게도 (동생이어도) 사과해야 하지만 나는 B의 그릇을 모른다.

그렇게 바라며 ‘이제 됐구나.’ 했다.




인간 사회에선 합의라는 단어가 엄연히 존재한다. 물론 조정, 효율, 안정이라는 단어도 있건만...


'이 그룹은 선택과 결정을 이런 식으로 기분 내키는 대로 마음대로 바꾸고 아무렇게나 결정하나.’


‘사람을 가려 사기라 함은,
조건이나 이로운 점 등을 보고 사람을 골라서 만나라는 뜻이 아니다. 나쁜 사람 즉, 교활한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 아부하는 사람, 무례한 사람, 뒤통수치는 사람, 비열한 사람, 속이는 사람, 음흉한 사람,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야비한 사람, 비위 맞추는 사람 등을 멀리하라, 적극적으로 피하라는 뜻이다.’


이거든 저거든, 뭐든 하기 싫으면 그냥 의사를 밝히고 하지 않으면 된다. 함께 하는 일이든 모임이든 다 같이 의논하고 결정하여 처리해야 한다. 누구 의사이든 어떤 사유이든 말한 사람이 책임질 몫이다. 그래서 ‘세 치 혀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사람마다 선택과 결정의 기준은 다르지만,
누구든 인간답게 살고자 노력한다.


모르고 했든 고의로 했든,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안 하는 게 맞다. 톡에 커피 봉사를 계속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나만 밝혔다. 그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머지 회원들은 모두 하지 않길 원했다.


이제 편안히 있기로 한다. 내가 아니어도 기운은 흐를 테니까.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서서히 뜸하게 연락하다가 무덤덤한 관계로 무시하거나 외면하면서 소극적으로 끝낼 수도 있었다. 쿨하게 서로 사과할 건 사과하고 피트니스에서 재밌고 신나게 운동하고 싶었을 뿐이다. 무시하거나 모른 체하는 식으로 무식하게 사람을 대하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우린 그냥 내버려 둬도 불편했을 수 있다. 잠시든 길든 어쨌든 각자 나름의 만족감은 있었겠지, 코로나로 무료한 일상이었기에.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처음 겪는 일이라 찜찜하지만...




모두를 대표하여 내가 C와 밥 먹는 자리에서 C가 말했다.

“그냥 B와는 내가 코드가 맞지 않은 거지.”  

이 말은 “피하는  상책”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C는 B와 자신은 여러모로 맞지 않으니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다. 왜 C는 자신의 의사를 B에게 솔직히 밝히지 않는 걸까. 자신이 가장 나이 많은 언니인데... C가 피하는 방법이 앞으로 C 모습이겠지. B가 처음부터 끝까지 C를 무시했기에 C는 말할 용기마저도 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평소에 자기 의사를 밝히지 않던 일상이 습관처럼 굳어 버렸나. 그도 아니면 과거에 유사한 경험이 있었던 걸까. 자기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외롭고 힘들 텐데, 이용당하거나 무시당할 수도 있고.

애매한 성격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실제 성격은 알 수 없다. 개인사에 따른 행동 결과를 짧은 만남으로는 알 수 없다. 음식을 다 먹어갈 즈음에 C는 자신은 B와 코드가 맞지 않으니 부딪히고 싶지 않다며 그냥 사적 만남을 더 이상 가지지 말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최종적으로 말했었다.

(직접 의사 표현뿐만 아니라 사양하거나 거절하지도 못하는 C성격이 안타까웠다. B와 A 같은 성격 사람이 차후에 C에게 취할 행동이 예상되어서다.)


이어진 끈이 없는 관계에선 코드가 맞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C는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아무런 노력도 하고 싶지 않다는, 하기 싫다는 뜻을 보였다.

‘C 의사를 존중하여 사적 만남을 정리해야겠구나.’

C는 이미 피트니스에서 변화무쌍한 인간관계를 미리 경험한 사람이다. 게다가 지금 갱년기에다 피트니스 내 다툼까지 요 근래 바람 빠진 풍선처럼 계속 늘어져 있었다.

‘그래, 젊지 않은 사람들은 유연성이 떨어져 변화에 빨리 적응하지 못하잖아.’

그러니 인간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자고 말할 수도 없다. 해결 가능한 사소한 일일지라도 본인이 개선 의지나 유지할 의사가 없으면 사소한 일도 심각해진다. 그냥 나보다 나이 많은 언니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한편 맘 속에선 ‘이렇게까지 이해해 줘야 하나,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이렇게 둘러서...” 이런 말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 다녔다. 나 자신을 조절하기 위해 떠오르는 말들을 서서히 한 음절씩 잠수시키며 침착해지려고 되뇌었다.

‘좋은 게 좋은 거랬지.’

이 말의 함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여러 상황에 적용하여(빠져) 종종 허우적댄다.

문제가 있을 때는,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문제가 발생했던 상황을 진단하여 옳지 않았던, 나빴던 점을 옳게 또는 좋게 해결하는 것이 지속적으로 좋은 거다. 이렇게 그냥 넘겨 버리면 그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이래선 안 되겠다는 말을 다시 되뇌며, 나만이라도...

난 아직 ‘It depends on.’이다.




그 그다음 날, B가 톡으로 내게 사과했다. 사과해 주어 마음이 편하고 고마웠다. 그래서 나도 B에게 호의적인 톡을 남겼다. 그래도 남은 게 있었다. 쓰다 남은 회비. ‘회비 정리만 하면 되겠구나.’


와아~, 이제 맘이 한결 편해지고 좋아져서 개리, 정인의 ‘사람 냄새’를 따라 부르며 울 귀요미 셜리 밥을 챙겨 주었다. “이 노래, 참 좋다!”


"사람 냄새~

~

~ ~ ~묶은 머리카락

모든 게 심플하지만 아름다움이 풍겨와

또 어딜 가든 예의 바른 행동과 미소와 말투

~

평범치 않은 아름다움의 소유자

~~"


아이, 행복도 잠시.

노래를 듣고 나서 기쁜 마음으로 회비 정리에 관해 톡을 올렸다. 난 그저 회비 마무리 내용을 남겼을 뿐인데, “이게, 뭐지?”


이 노래처럼,

사람처럼 사람같이

아름답게 예의 바르게,

선한 사람 냄새가 그립다.

사람 냄새나는 그런 사람이 좋다.


사람 냄새나는 사람인 줄 착각하고 만난 이들에게도 이 좋은 냄새가 나기를 바랄 뿐이다.


...,

이번엔 A가 갑자기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톡에 남기고 단톡 방을 나가 버렸다. 이것마저도 B가 한 행동을 따라 하다니 당황스러웠다. 많이 배려하는 스타일로 보였는데.  “정말 사람이란 알 수 없구나.”

통찰력을 더 키워야겠구나.


뭔가 A가 또 오해했나 보다. 아니면 A 자신만 챙긴 건가. 자기감정만 추스른 것일 수 있다. A는 평상시에도 어떤 일이 생길 때마다 대처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 오해받거나 자신이 오해하기도 했다.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나. 타인에겐 관심이 없나...


회비 정리 톡을 남기기 전에 A와 통화했었다, 사적 만남에 관해. A는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현 상태로 보아 그만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회비 정리를 어떻게 하면 좋은지 의견을 묻고 나서 각자 원하는 대로 처리해 주고 마무리하자고 얘기를 나눈 후 전화를 끊었었다. 그런데 왜, 회비를 정리하자는 톡을 읽고 A는 그냥 톡방을 나가버린 걸까. 운동(피트니스)이라는 끈이 연결되어 있는데 말이다.

회비 정리 톡에 적었던 내용은 우리가 좋았던 때도 있었지만, 요 근래 불편한 일이 생겨 사적 만남은 그만하고 그냥 피트니스에서 만나 운동은 즐겁게 하기로 했으니, 회비 정리를 위해 각자 의견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A는 감정적인 기분 나쁜 내색을 담은 글을 한마디 ‘툭’ 던지고 톡방을 매너 없이 ‘쑥’ 나가버렸고, B는 자신은 불편하지 않았다는 톡을 불편한 내용으로 남겼다. 등 돌린 연인처럼 A와 B는 이렇게 반대 노선을 엉뚱하게 보여줬다.

핵심 내용은 그냥 회비 정리’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이건 또 뭐지.’ 의아했다. 반전에 반전이다.

‘괜히 사과한 톡에 호의적인 말을 남겼나.’ 거리를 더 두었어야 했다. 제대로 된 진지한 반성이나 후회 없이 수긍하고 나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꼴이었다.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불편하기에 불편함을 만드는 것이건만. 서로 불편했던 걸 인정하고 그 요소를 조심하며 조금씩 불편함을 줄이면 서서히 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을...

B자신은 모르고 있었구나. 만약 B가 불편하지 않았더라도 C가 나와 둘만 있었을 때 B가 불편하다고 말했던 사실을 말이다. 불편하지 않았다고 반색하는 건 알고 보면 자신도 무척 불편했다는 걸 더 강조하여 밝히는 자폭이다. 이럴 수가.. 감춘다고 하여 감출 수 있는 게 아니거늘.

C는 B처럼 이런 어이없는 사람들이 다이어트 댄스에는 참 많으므로, 앞으로는 다이어트 댄스에는 들어가지 않고 줌바만 들어갈까 보다고 말하기까지 했었다.

‘충돌이 싫어서, 사이가 나빠질까 봐서 불편한 걸 말하지 않을 수도 있고 불편하다고 말해도 못 알아들을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의 실체가 드러날까 봐 감출 수도 있다.’

내 의사를 밝혔던 나에 비해, A와 C는 만남 내내 B에게 직접적인 말은 전혀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었다. 내가 뭔가가 있나. A와 C는 B가 불쌍했었나. 애처로워서 좌충우돌 B를 그냥 내버려 둔 걸까. C는 그저 허허 웃으며 참았고, A는 모른 체하며 B를 내버려 뒀었다.


참고 피하여 문제가 극복되고 해결된다면 좋겠지만, 내버려 둔 문제는 도리어 고통이 되고 자신 속에 더 깊은 뿌리를 내린다고 하지 않던가. 셰퍼드는 심신을 괴롭힌 문제를 억누르고 회피하면 그것이 오히려 자신 인생을 최저점으로 끌어내리려 한다고 말했다.

은폐하는 식의 대처가 아닌 정면에서 견디고 행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당연히 불편했던 것을...

B는 C에게 사과한다며 걸었던 전화에서 사과는 하지 않고 C에게 불편했었냐고 먼저 물어보았다고 했다. 그저 그리 물어보기에 거기에 아니라고 할 수 없어서 C는 그냥 불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했다. 사과가 아니라 C를 다시 또 공격하다니. 그동안 하던 대로 했다고 했다. C는 금세 알아차렸고 빨리 해결하고 싶어 불편하지 않았다고 말하고서 전화를 끊어버렸다고 했다. C는 자신도 모르게 어처구니없어서 내심을 숨기고 B에게 거짓 동조를 해 버렸다고 한다.


C에겐 용기가 필요한 걸까.

C는 그동안 피트니스에서나 만남 후에, B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내게 여러 번 말했었다. 앞뒤가 다른 C는 왜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B와 C관계에 다른 무엇이 있는 걸까. 이러한 C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쨌든 현재, C의 첫인상은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앞으론 어떤 모습일까.’


웃음은 흔하지만 유머는 귀하다. 매번 피트니스에서 볼 때마다 유머로 웃게 해 주던 C가, 유쾌한 성격인 줄 알았던 C가 B가 있는 자리에서는 B만 있으면 유머 한마디도 못하고 자신 속내조차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여 쩔쩔매는 사람이 되다니... B가 C에게 보여 줬던 강한 반감과 부정의 영향일까. 그들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모르는 C의 또 다른 모습이 있는 걸까.


A도 첫 만남 후엔 불편하여 만나지 말자고 본인 스스로 선언했었고 내게 불편함을 내색했으면서도, B가 불편했었냐는 질문에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어떤 의미의 침묵이었을까. 방관? 무시? 경멸?


“진실을 침해하는 것은 침묵과 거짓말”이라는 이언 피어스의 <핑거 포스트, 1663> 잠언처럼 거짓말을 만들고 거짓말로 바꾸고 마지막엔 전부를 거짓말로 간주해 버리는 경우였다.


그 순간,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유일하고 절대적인 길, ‘손가락 모양의 길 안내 표지’  핑거 포스트가 절실했다.

진실은 언제나 진실이다.”라는 제목으로 문학 평론가이자 소설가인 김탁환이  <핑거 포스트, 1663>에 대하여 서평을 썼었다. 그 제목이 지금 나를 위로할 뿐이다.


“세상은 비밀과 거짓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가만히 있어도 사실에 근거한 진실은 밝혀진다.”


B는 그동안 정말 불편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보여줬던 여러 가지 사례를 적고 싶은 충동이 인다.


자신이 약속을 여러 번 어기고 번복한 걸 알지만 자신은 그런 걸로 불편하지 않았다니, 이럴 수가 있을까.


어쨌든 현재, B는 내게 미스터리다. 첫인상은 귀여운 표정에 밝은 모습이던 B가 내게 남긴 마지막 인상이다.


머리만 쓰고 살다가 운동하며 건강을 지키려 했을 뿐인데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약속의 소중함과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란 걸, 내가 B자신에게 알게 해서 B는 그걸 이제야 알게 되어 불편해졌다고 나중에 말했었다.


어른들이 말했었다. 나이 많은 지인들도 말했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 거라고. 좋은 사람은 계속 좋을 것이고 나쁜 사람은 계속 나쁠 것이라고.’


공자께서도 제17편 양화에서 말씀하셨다.

오직 최상급의 지혜로운 사람과 최하급의 어리석은 사람만은 바뀌지 않는다.”

딸과 나는 '사람이 변할 수 있는가'를 주제로 종종 대화를 나누었다.


참, 어린 딸도 달관한 듯 말했었구나.

사람은 변하지 않아요. 특히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이 변하기 어렵다는 건 모두 알고 있다. ‘사람은 변하지 않으니 애초에 바른 사람을 만나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바꿀 순 없으니, 깨닫게 하려거나 변하게 하려다간 오히려 상처받는다고 말이다. 사람이 변하는 건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이다.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피하는 게 낫다.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면 아무 문제 없이 공적으로는 잘 지낼 수 있다.


결국 ‘사람이 변하기는 어려운 거구나.’

그렇다면, 변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면, ‘그래도 태도는 바꾸어 줄 수 있는 거잖아.’라도 되뇐다.

... 푸흐, 바라지 않기로 한다. 태도마저도.




다시 또 어이없어 가족들에게 상담을 했다. 가족이 있어 참 좋다.

신랑은 그냥 이렇게 말했다.

“만나지 마, 자기를 신경 쓰이게 하는 사람은 만나지 마. 즐겁고 좋은 사람만 만나.”

딸은 내가 귀엽단다.

“제가 중학교 때 겪었던 일을 엄마는 이제야 겪고 이제 알게 되시네요.”

아닌 사이(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 기본 매너가 없는 사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의 사이 등)는 만나지 않는 거라고 덧붙였다.

아들도 말했다.

“엄마는 올바르게 대처하셨어요.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네요.”


어떻게 서로 불편했든 간에, 불편한 당사자들이 상대에게 얘기하지 못하여 난처해하고, 서로 눈치만 보며 괴로워하고 있다면 옆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서로 도와줘야 하지 않는가. 어쩌면 우린 아무도 그러지 않았던 걸까.

언니는 언니답게, 동생은 동생답게 행동하지 않은 거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언니는 언니 노릇을, 동생은 동생 노릇을 하지 않은 거다. 누가 덜하고 더한  건 있었을지라도.

(나는 동생만, C는 언니만이 주어진 역할이었고 A와 B는 언니와 동생 둘 다 주어진 역할이었다.)


타인을 도와주는 것이 알고 보면 결국은 자신을 위한 것이란 걸 알 텐데...

그도 아니라면, 사회에서 기본과 원칙이 있듯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사람 사이에서도, 지켜야 할 기본과 원칙이 있다.


어떤 경우든 사람에 대한 예의만이라도 지켜 주길 바랄 뿐이다.

 

앎과 무지의 경계는 여기에서 마무리해야 하나.

‘친구와 적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소크라테스를 만나기 위해 책을 다시 펼친다.





이 일이 있은 그다음 주에 오랜 지인들을 만났다. 그날 만났던 지인들과는 서로 항상 솔직하다. 우리는 사실적인 스토리에 대해 현실적이며 철학적인 대화를 즐긴다. 많은 얘기를 나누며 유쾌한 시간을 보내다가 대화가 무르익을 즈음에, 이 사례를 들은 지인들이 말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자신도 돌보지 않아서 허무주의에 빠져 있어요.”


"자신 있게 자기 의사를 밝히지 못하는 사람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해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기도 하죠. 그리고 자신과 남을 모른 채 하여 방관자가 되기도 하죠.”


"자신이 자기 자신을 모른 체하고, 거기에다 남까지 모른 체하는 사람은 평소에 부당하고 불편한 대우를 받았더라도 본인만 괜찮으면 아무 말을 하지 않았거나, 그냥 지나쳐 버리며 살지 않았을까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자신도 모르게 자신 삶에 그것들이 잠식되어 있어, 제대로 대우받는 걸로 착각한 거죠. 그리고 어차피 자신이 질 싸움이라는 생각에서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애초에 꼬리를 내린 경우일 수도 있고요. 이게 바로 열등감이죠. 열등감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습관처럼 자신을 낮게 평가하여 상대보다 아래에 내려 두는 거죠. 그래서 오히려 부당하고 불편한 대우를 받고 사는 게 편하고 옳은 삶인 줄 착각하고, 잘못 알고 살 수도 있어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나 사랑한 적 없는 사람은 즉 아무도 사랑해 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받고, 챙기고, 받는 것(선물을 주고받거나 감사한 표현을 하거나 듣는 등 챙기고 챙김 받는 마음)과 같은 당연한 것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어요. 오히려 불편한 것이 편하고 잘해 주는 게 부담일 수 있죠. 불쌍하게도 자신의 권리를 찾지 못하고 산 사람일 수 있어요. 누구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건만.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도 모르잖아요.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못하여 적을 사랑하거나 지지하고, 오히려 아군을 미워하고 괴롭히며 공격하고 있을 수도 있죠.”


자신을 모르거나 자신이 어떤 고통 속에 빠져 있는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격려나 용기의 말도 들리지 않을 수 있다. 허둥대며 그저 허겁지겁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자신을 더 깊은 수렁에 빠트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타인의 고통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그래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가능성을 오로지 우리 안에서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느린 희망’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_이권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마을의 풍속이 인하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인한 마을을 잘 골라서 거처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


“인하지 못한 사람은 오랫동안 곤궁하게 지내지도 못하고 오래도록 안락하게 지내지도 못한다. 인한 사람은 인을 편안히 여기고(인자안인), 지혜로운 사람은 인을 이롭게 여긴다(지자리인).”

_논어, 제4편 라인


“오직 인한 사람이라야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다.”_논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듯

무난하던 인간관계에서 발을 헛디디는 실수를 했구나.


...,


자연의 섭리는 사람을 가리거나, 좋거나 나쁜 것과는 상관없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인생에 되돌려 줄 뿐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돌아온다. 삶은 우리의 주된 생각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사람이 다른 생명체와 다른 점은 분별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자유의지를 써서 자기 생각을 선택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생각하고, 그리하여 원하는 삶을 창조할 수 있다. _Rhonda Byrne


생각의 힘이구나!

생각이 생각을 끌어당긴다.


그래!

좋은 생각으로

좋은 걸 끌어당겨

내 곁에 좋은 것으로 더욱 가득 차게 하리라.




이전 01화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지는 삶이거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