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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ileall Jun 18. 2020

무엇이 이리도

그땐 그랬구나.

사람의 본심을 알 수 있을까.


대부분 본심은 언제든 드러날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처음엔 친절한 모습으로 다가와서 줄곧 호의적이었다가 갑자기 본심을 드러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부끄럼 없이 본심을 드러내는 이도 있다.


인간은 보통 어떤 시점에 본심을 드러낼까.


갖지 말아야 할 마음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자제하지 못할 때 슬며시 고개 드는 정체가 바로 본심이다.

자신이 결정한 일만 하고 싶어 하는 사람, 즉 자신이 내린 판단만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에겐 그 무엇도 권하지 않게 된다. 권하지 않는 직접적인 이유가 무엇이든, 싸늘히 식어버린 가슴을 소유한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자신만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자신만 챙기는 차가운 사람과는 누구도 함께 하지 않는다.


그 어떤 누구와 함께이든 어떠한 상황이든 사람들은 자신을 믿고 살았다.


누군가가 오랫동안 보여 줬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 사람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선한 말을 하면 선한 사람인 줄 착각한다. 선한 행동까지 보여줘야 선한 사람인데 말이다.

둘이서만 만나 얘기하다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를 수도 있다. 둘일 때는 조금 긴장하여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을 표출하지 않고 감출 수도 있다. 게다가 무의식을 제어할 수도 있다. 즉 한 사람 정도에게는 맞춰주기 쉽고 자신의 본모습을 조절하여 감추기가 쉽다.
반면 오히려 둘일 때 더 진솔하고 말이나 행동, 태도 를 더 정성껏 더 진실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둘일 때 더 가식적인 사람도 있다.

누군가와 더 좋은 관계, 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싶다면 여러 명이서 여러 번 만나 특수한 상황까지도 겪어 보면, 원래 쓰는 말투와 감출 수 없는 본모습이 자연스럽게 ‘툭’ 튀어나오는 걸 볼 수 있다. 물론 반대 성향인 사람도 있다. 함께일 때 더 감추고 둘일 때 더 솔직한 이도 있으니까.

보통 타인의 단점도 수용할 수 있을 때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의사(의지)가 있다고 본다. 그저 단점일 뿐이라면 그 정도는 수용하고 만남과 관계를 계속 유지해도 되지만 단점이 아닌, 즉 단점이 나빠져 악의가 되어 버린, 악의를 품은 이라면 그런 사람은 피해야 한다. 자신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은 관계 속에 악의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좋은 사람은 해가 될 일을 권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잠깐 만나는 이에게도 불쾌감을 주는 사람이라면 바로 피해야 한다. 신인 양 자신이 타인을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함을 버린다면 주변에 선한 이들로 가득해질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관계가 바로 그 사람 자체를 대표하듯 자신의 지인이 곧 자기 자신이니까.

성인들은 적과 아군을 분명히 구분했다. 참 어이없지만, 인간은 대부분 우둔하기에 극히 드문 지혜로운 자를 중상모략한다. 자신의 우둔함과 모자람을 감추기 위해서다.


스스로 자신은 사람 중심이라고 말하고선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생각을 실천할 수 없어서 말로만 그런 사람인 척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옳은 건 말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쁜 건 말만 해도 어느새 자신 곁에 자리 잡기 때문에 말을 조심하거나 가려서 해야 한다. 하지만 옳은 일은 말보다 꾸준히 실천해야 얻을 수 있다. 이 사실은 오래도록 내려오는 진리다. 그러기에 말로는 ‘함께’를 주장하면서 행동은 ‘함께가 아닌’ 사람들은 거짓 몸짓을 감추려 해도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이 자동으로 툭 튀어나온다.


모든 걸 단순하게 생각하여 인간관계를 무조건 단칼에 자를 순 없다. 좋은 점도 있으니까. 어떤 인간관계든 정성스럽게 보낸 세월도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미련을 가지게 하는 대상은 최종적으로 성격(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초창기에는 아주 친절하게 잘해 주었다가 나중에 가서는 서서히 불친절해지면서 괴롭히는 행동 등 처음과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럴 때 상대의 달라진 모습을 쉬이 용납할 수 없어도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다. 성격(인격)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가진 대표적 모습이기 때문이기에.




인간관계에서 사생활을 적당히만 공개하고 완전히 공개하지 않는 걸 권장한다. 어차피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불편한 사적 얘기는 경청하지도 않고 남의 일에는 관심도 없다. 없는 말도 만드는 사람들 투성이인데, 타인의 불행한 사생활은 그저 뒤에서 한번 더 도마질하여 가볍게 다시 떠벌릴 뿐이다. 본의 아니게 들었을지라도, 듣는 이가 내색하지 않았다 하여도, 어찌 되었든 타인의 불행한 사생활은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심장에 감기가 걸릴 정도로 따끔하다. 누군가가 생각 없이 투척한 사생활 내용을 부지불식간에 들은 사람은 준비하고 들은 게 아니어서 그 내용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 대응 차원의 일환으로 들은 내용을 타인에게 다시 토해내는 도마질과 떠벌림으로 해소한다. 좋게든 나쁘게든 어떻게든 당사자에게 부메랑을 날릴 수 없는 상황일 경우다. 이는 투척받은 걸 그대로 돌려줄 수 없을 만큼 슬픈 사연일 경우에 또 다른 타인에게 버려서 해소하는 꼴입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더니’, 스스로 이겨내야 할 자신의 사생활을 아무 상관없는 타인에게 그것도 불시에 투척해서 괴롭혔기에 결국 그 사실을 주변 사람들 모두 알게 된다. 조금씩 나누어진 파편일지라도 불행을 퍼트리는 악순환이다.


지극히 사적인 얘기(심각한 사생활)를 말하고 싶으면 상담을 받으면 된다. 일반 사람들은 상담이나 정신의학에서 전문가가 아니다. 지인에게 심각한 사생활 얘기를 하는 건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된다. 그러니 일반적 사생활은 지인과 대화로 풀 수 있지만 지극히 사적인 얘기는 해결할 수 없다. 이때 말하는 지극히 사적인 얘기는 몹시 힘들고 불행했던 개인사나 부도덕했던 행위 등을 일컫는다. 그렇기에 그런 얘기를 한다는 건 타인을 쓰레기통 취급한 거다. 누구든 일반인은 심리 계열 전문가가 아니므로 그런 수위의 얘기를 들으면 감정을 조절할 수 없다. 애석하게도 그런 얘기를 들은 타인이 심장병에 걸릴 수도 있다. 타인의 불행일지라도 듣는 순간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런 얘기를 들은 타인도 당사자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불편해지고 기분이 상하여 온몸이 괴로워진다. 심하면 타인에게서 들었던 괴로운 기운이 남아서 그와 비슷한 나쁜 일이 주위에 옮겨지고 또 다른 타인도 불행해진다.


타인의 인생사는 타인의 몫일지라도 세상엔 해선 안 되는 행동이 있는 법이다. 자신의 불편한 사생활을 내뿜듯 얘기하여 타인을 괴롭혀선 안 된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무례한 행동이다. 상한 감정은 시시때때로 바뀐다. 부메랑에 무얼 싣고 언제 어떤 속도로 되돌아갈지 모를 일이다.


타인에게 지극이 사적인 걸 말하는 순간, 타인은 부담을 느끼게 되고 결국은 모두가 부담스러워진다. 자신의 비밀을 드러낸 후 상대(=상대방, 타인)도 말해 주길  바라는 경우도 있다. 상대에겐 그런 종류의 비밀이 없을지라도 말이다. 이때 애써 호응할 필요는 없다. 불편한 스토리를 털어놓았던 누군가의 개인사가 상대방에겐 없을 수도 있으니까. ‘대체 무얼 얘기하라는 거지. 자신과 다른 삶이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나.’ 혼잣말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 있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자신과 똑같은 사람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자신은 오직 자기 자신 한 사람뿐이다. 타인도 세상에서 오직 그 한 사람뿐이듯.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데이터)을 바탕으로 타인을 판단하려 해선 안 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듯, 타인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어떤 관계든 유지된다.


타인의 선을 밟지 않도록 하자. 자신의 선을 지키면서 타인의 선도 밟지 않는 매너를 가지자.




그땐 그랬구나. 세상의 법칙과 이치는 알았어도 사람들이 가진 진짜 모습을 파악하긴 쉽지 않았구나.

만남에서 배려와 존중은 참 중요하다. 모든 인간은 똑같이 배려받고 존중받고 싶어 한다. 인간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관계 형성에서 사랑, 배려, 존중, 신뢰는 필수적인 요소다. 이 모든 걸 상실한 채 행동하는 사람을 과연 그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원치 않는 관계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오히려 더 좋다. 상대가 모르는 일이어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어도 기분이나 감정은 말해 주는 게 좋다. 핵심 없는 말만 계속할게 아니라, 맘을 아프게 할 게 아니라, 지난 과거사를 둘러 말할 게 아니라, 그 당시 자신의 감정이나 바라는 바를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다.

(2020.6.19)




세상에서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것으로 늘 강조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의"다. 존중이 깃들여진 태도다. 그건 사람을 빛나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2016.7.10)


처음에는 예의를 지키며 다가왔다가 슬며시 예의를 버려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경우, 그 상대는 어떠했을까.

아마 그 상대는 반응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상대가 인격자일 경우는 물론 예의는 지켰겠지만 좋은 감정은 아니었을 거다. 예의 없는 사람과는 무얼 하든 담담했을 거다. 예의를 버린 사람의 맘을 알아 주려 노력해도, 애초에 없던 감정으로 얼마나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리 되면 그나마 예의를 지키던 상대도 서서히 예의를 잃어버릴 수 있다. 점점 더 예의가 사라지고 자신이 표현했던 모든 말들이 무색할 정도의 표정을 지으며 드디어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 죽 된다. 결국 서로 종지부를 찍는다. 그냥 예의를 지키며 관계를 정리하면 되는데 인간은 상호 의존적이다. 그만큼 나약하다. 쉬이 함무라비 법전을 따를 만큼, 인간은 이리도 나약하구나.

누구든 자기 입장, 자신이 우선이다. 특별한 감정 없이 시작한 인간관계여도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과 달리 행동(예의)과 감정이 점점 옅어지는 사람도 있다. 흔들리는 감정을 그 상대를 견뎌줄 수 있는가도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와 자신이 교육관, 자녀 양육, 부부관계, 인간관계 등 그냥 다르기만 해도 괜찮을 텐데. 사람의 본모습을 그냥 견디고 수용하기란 심히 어렵다. 그 외에 몰랐던 새로운 모습도 추가되면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찮다는 듯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일방적으로 주고받는다.


무엇이 이리도 슬플까.

인간관계, 사람이 이리도 슬플 수 있구나. 하지만 나는 외친다. 아직도 외친다. 기대하며... 외친다.

어쨌든, 선하면서도 편한  즐거운 사람이 좋다.”

(2020.6.28)





우효의 “민들레”를 들으며 마음을 정리한다.


https://youtu.be/rvZtGFiHimA


노래는 노래일 뿐

맘은 맘일 뿐


그땐 아프다고 말했던 걸 몰랐다

타인의 상처를 몰랐다


나이는 나이일 뿐

지금도 모를 수 있다


그저 맘을 전할 뿐(응원할 뿐)


맘이 풀려도

그 맘을 알아도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

지나간 맘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런 세상을 어쩔 수가 없다


서로 반대로 걸어가던 길

다른 생각, 다른 맘은 함께 할 수 없다


뭐든 원래로 되돌릴 순 없다

그런 원칙을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순간이,,,

소중하다

(사람의 태도, 202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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