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좋아하고 무언가를 싫어하는 마음은 어디서 비롯될까? 나도 모르게 어떤 사람을 보면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 자석처럼 짝 달라붙고, 어떤 사람을 보면 불편한 기분에 멀리 저 멀리 달아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 사람의 면면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벌써 애착하는 마음이 생긴 사람에 대해서는 단점은 잘 안 보이고 장점 만이 은하수처럼 찬란하게 빛나 보인다. 반대로 뭔가 가치관이나 태도 등 나와 다르거나 불편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에 대해서는 다른 면면은 살펴보려 하지도 않고 피하고 싶어 진다. 이것은 때로 의식하기 이전에 이미 감각 차원에서 일어나 행동을 결정지어 버려, 스스로를 깜짝 놀라게 하곤 한다. 뭐지? 이 감정의 정체는?
스피노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크게 ‘기쁨’과 ‘슬픔’, ‘욕망’으로 나누어 이해했다. 그중 ‘욕망’은 자기 보존을 위한 인간의 본질 자체로, 의식을 수반한 충동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기쁨’을 보다 작은 완전성에서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 ‘슬픔’을 보다 큰 완전성에서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기쁨’이 보다 작은 완전성에서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인 것은 ‘기쁨’이라는 감정에 의해 신체와 정신의 능력이 증대되기 때문이고, ‘슬픔’이 큰 완전성에서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인 것은 ‘슬픔’이라는 감정에 의해 신체와 정신의 능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쁨’이라는 감정과 ‘슬픔’이라는 감정이 대상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수동적인 것이기만 하다면, 기쁨의 폭은 한정될 수밖에 없고 슬픔은 대처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을 만날 때만 기쁨이 일어난다면, 나는 계속 기쁨을 발생시켰던 존재에게 마음을 고착시키며 그 외의 것과 조우할 기회는 상실할 것이기고, 기쁨의 대상을 잃는다면 큰 슬픔에 빠질 위험이 있다.
신체와 정신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감정인 ‘슬픔’은 어떤가. 어떤 대상에 의해 자동적으로 싫어하는 감정이 일어났다고 해보자. 그 대상을 피할 수 있다면, ‘슬픔’의 감정을 곧 털어버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같이 사는 가족이나 직장 상사, 모임의 구성원 등 심리적 안정감을 침범하는 존재들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슬픔’의 감정을 방패막 없이 날 것 그대로 흡수해 버리면, 도처에 깔린 ‘슬픔’의 대상들을 감당하느라 진이 빠질 것이다. 점차 ‘슬픔’을 피하기 위해 운신의 폭을 줄이고, 하고자 하는 것들을 줄이며 무기력해 질 수 있다.
다행히 마음은 길들이기에 따라서 변화하는 능력이 있다. ‘뇌’의 구조는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시냅스의 연결망을 바꾸며, 스스로 자신에 대해 인식하는 바와 느끼는 바가 변하면 자아 정체성도 변한다. 세상 모든 것이 변화하는 ‘무상’의 세계에서 마음이라고 변화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일차적으로 발생한 좋고 싫은 느낌에 맹목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는 연습은 ‘평정심’이라는 내면의 힘을 자라게 한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성격을 수술하는 신체를 바라보는 외과 의사의 눈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알아차린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감정과의 동일시에서 분리되며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다. 그리고 안정된 호흡을 지속하며 감정으로 인해 흥분된 신체를 안정시키면 신체와 연결된 마음이 점차 평온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차분해진 상태에서 좋고 싫음을 벗어나 타인이나 대상을 고찰하면 오해와 착각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지혜가 발동한다.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일어난 환상이나 집착이 떨어지면 담담히 그 대상의 면면을 수용할 수 있게 되고 들뜬 마음도 편안해진다.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 일어난 오해나 망상이 거두어지면, 문득 대상의 유익한 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 적어도 ‘슬픔’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지혜는 얻게 될 것이다.
언젠가 넓고 깊어진 평정한 마음속에 기쁨도 슬픔도 봄날 잠시 들른 꽃 향기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고, 진흙 위에는 사랑의 발자국이 새겨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