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맨(Hopeman)작가의 희망철학?
절망해 본 사람이 희망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나락으로 떨어져 본 사람이 평화로운 일상 속 먹고살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실패해 본 사람이 성공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성공은 실패를 딛고 일어서 성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슬퍼보지 않은 사람은 기쁠 수 없습니다. 기쁠 수 있는 것은 슬퍼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로워보지 않은 사람은 함께 하는 행복을 잘 알지 못합니다. 외롭고 고독하여 혼자 있는 것이 너무 힘든 체험을 해본 사람은 단짝, 친구, 가족의 소중함을 진정으로 알게 됩니다.
죽음을 아직 모르기에 우리는 철학을 합니다. 삶은 동사입니다. 살아가는 것은 사유하고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행동하고 기뻐하며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삶이 유한한 것을 알고 절망하는 사람은 희망을 모릅니다. 희망이 있기에 삶이 아름답습니다.
<호프맨(hopeman)작가의 희망(hope)을 위한 철학.. >
키르케고르는 그의 대표작에서 절망을 병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의 책에서 심하게 표현한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고 했지요. 또 역설적으로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절망할 수 있기에 절망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또 불안과 고통이 없는 인간이 없기에, 절망하지 않는 인간도 없다고 했지요. 그의 해결 방안은 신에 의해 진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의 도약에 방점을 찍은 것이었는데 절망에만 너무 집착하고 그의 철학을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겁니다.
사실 죽음을 철학하는 것은 종교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접어버리던지, 신화에 기대어서 신들의 영역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생각하지 않던지, 어떤 것이지 막연한 두려움과 경외감이 생기는 것이 고대 인류의 생각들이었습니다. 종교가 창시되고 신화의 시대에서 살았던 그들의 생각들이 이제 많이 구체화되었습니다. 현대의 문학가, 철학자들에 의해 '죽음'에 대하여 더 깊숙하게 질문하고 답을 하게 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뇌과학을 통해서 또는 죽음 이후를 증명하는 과학을 통해서 우리는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답을 구하려고 합니다.
21세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철학가, 예술가, 문학가들이 죽음을 이야기하고 스토리를 만들었을까요! 그 스토리가 꼭 절망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연옥과 천국도 생생하게 그려내었으니까요.. 구원의 사후 세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열심히 살아내면서 죽음을 구원의 길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게 됩니다. 종교적인 구원도 포함해서 그렇게 살면서 성찰하게 되는 것이 삶을 위한 통찰의 과정이고 인문학적인 깨달음이 됩니다. 심지어 절망하는 자들에게 죽음은 안식이 될 수 있을까요!
키에르케고르, 그의 유명한 책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에 대하여 너무나도 깊게 철학적 사유를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그처럼 절망의 생각을 달고 산다면 삶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절망에 대하여 그가 사유한 것을 무어라고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의 철학이 유신론적 실존주의로 이어지고 후대에 영향을 준 위인들이 많기에 감히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랍니다. 키르케고르는 쇼펜하우어를 만나서 그들의 철학을 교류하고자 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일찍 42세에 저세상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뒤의 철학가들, 하이데거, 사르트르, 보부아르, 비트겐슈타인.. 문학가들, 프란츠 카프카나 헤르만 헤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만족해야 하였습니다.
그의 삶이 불행하였을까요? 그는 뮤즈였던 레기네 올센(1837~1841년)과 파혼당하였지만 그녀가 유능한 공무원과 결혼한 이후에도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속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몇 년이 지나자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만답니다. 이 한 가지 사랑의 경험으로 그의 삶이 불행하였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백을 한 숨겨진 스토리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첫 번째 부인이 병사하자 혼전에 집안의 하녀와의 관계로 임신을 하게 한 것이지요. 이는 덴마크 국교(기독교)에서 절대 인정되지 않는 것이고 이를 죄를 지었음을 아들 키르케고르에게 고백한 것으로 그는 젊은 시절의 방황을 도리어 정리합니다. 그의 형제들, 아버지, 어머니까지 차례로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절망>의 철학을 사유 사변하였던 것을 당연합니다.
쇼펜하우어의 고통에 대한 철학, 키르케고르의 절망의 철학 모두 결국은 사람들의 삶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철학적인 고민이었습니다. 그들의 고민들이 실존주의의 인간을 철학 하게 되었으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희망의 철학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보통 사람들을 위해서 절망이 아닌 희망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절망해 본 사람이 희망을 철학할 수 있고,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절망을 반드시 슬퍼만 할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있기에 유한한 삶이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는 이 생애를 열심히 희망을 그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불멸의 신은 무료합니다. 사람들은 이 생을 무료하게 보낼 여유마저 없습니다.
그것이 절망이라면 대신 희망의 글을 쓰겠습니다.
절망해 본 사람이 희망을 알 수 있습니다.
실패해 본 사람이 성공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슬퍼보지 않은 사람은 기쁠 수 없습니다.
외로워보지 않은 사람은 '함께 하는 행복'을 잘 알지 못합니다.
죽음을 아직 모르기에 우리는 철학을 합니다. 삶은 동사입니다.
동사이기에 멈추지 않고
희망을 숨 쉬게 하고 노래하고 싶습니다.
<호프맨작가 희망의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