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에서 물멍하면서 파우스트의 대사가 생각났습니다.
삶은 왜 멈추면 안 되나요? 삶이란 꼭 앞으로 전진하여야만 하는가요?
인문학은 노를 젓는 법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인문학은 오히려 노를 젓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배를 멈추고 바라보게 합니다.
살아가는 여행을 멈추게 합니다.
우리의 삶이 너무 빠르지 않은지 바라보게 합니다.
강물에 떠가는 유람선은 강변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그 안의 승객들은 강변의 사람들과 풍경을 통해서
자신들을 생각하게 될까요? 그저 여행객으로서 강변의 지나는 풍경에만 몰두하게 될까요?
유람선이 우리의 인생이라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너무 빠르고 너무 많았습니다.
이때, 우리의 삶의 속도를 멈추게 하는 질문들이 많이 생깁니다.
인문학은 삶을 멈추고 돌아보게 합니다. 인문학의 힘은 우리를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대사 중에서>
"그 안락과 평화! 어느 것도 바라지 않아
내가 만일 이것으로 족해
게으름의 자리 위에 길게 드러눕는다면
내 생명의 끝이 되어 그렇게 누워 쉬게 되니라
네가 그럴싸하게
나를 부추겨 스스로 만족하게 하고
쾌락으로 내 혼을 빼앗아간다면
그것이 내 최후의 날이다
내기를 하자
...
이렇게 한 이상 다른 말은 있을 수 없다
내가 순간을 향해 말하노니
'멈추어라 너는 참 아름답구나'라고 말하면
네가 나를 사슬로 칭칭 묶어도 좋다
나는 기꺼이 멸망해 주마
장송의 종이 울려 퍼지고
너는 종자의 임무로부터 해방된다
시계는 멈추고 바늘은 떨어진다
나의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나의 지상의 나날의 흔적은
영원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을 것
그런 드높은 행복을 미리 느끼는 가운데
지금 내가 지고의 순간을 누리고 있구나.
언제든 내가 느긋이 게으름의 침상에 눕거든
그때가 바로 나의 끝이에 하라!
나 자신이 내 마음에 든다고
내가 환심을 사며 나를 속일 수 있거든
내가 나를 향락으로 기만할 수 있거든
그것이 나의 마지막 날이게 하라.
내기를 하자!"
이 대사는 괴테의 '파우스트' 중 가장 유명한 대목으로 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사이에 계약이 완성되는 장면입니다. 세계문학 사상 가장 유명한 대사이기도 합니다.
괴테는 이 대사를 통하여 순간의 아름다움과 삶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줌과 동시에 인간의 순간적인 쾌락을 경고합니다.
괴테가 50여 년간 평생의 필작으로 완성한 <파우스트>의 교훈은
주인공 파우스트가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절망한 노학자의 모습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는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멈추어라, 너 참으로 아름답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이는 삶의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진정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 깨달음은 동시에 파멸로 이어지는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역설적인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사의 거대한 지식으로도, 순간적인 쾌락으로도, 심지어 순결한 소녀 그레트헨과 신화 속의 미녀 헬레나와의 사랑으로도 충족되지 않았던 파우스트는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참 아름답구나'라고 외치는 순간 죽어 그 영혼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넘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상 국가를 실현해 가던 파우스트는 결국 이렇게 외치고 죽게 됩니다. 그러나 신은 천사들과 함께 그를 구해 냅니다.
파우스트가 방황하면서도 노력하는 인간이었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자아를 찾아 끝없이 방황하는 파우스트는 절규합니다.
“Who am I? 나란 존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괴테가 자신에게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던지는 화두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일까.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중세 독일에 생존했던 파우스트란 인물은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인공입니다. 그중에서 괴테(1749-1832)의 「파우스트」(1832)가 제일 유명한데요, 이는 파우스트라는 양면성의 인물을 통해서 질문을 던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유한한 생애의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파우스트」에 구현된 인생이란 어떠한 것인가요? 파우스트는 자기 본질과 우주의 비밀을 깨닫기 위해 선악을 초월해 노력하는 인간이랍니다. 인류사의 모든 학문을 섭렵하지만, 궁극적 진리를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절망하는 대학자, 철학가의 오열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오열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연의 비밀을 통찰하고 최고의 향락을 맛보고자 악마에게 몸과 영혼을 팔게 됩니다. 그가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한다면, 저세상에서 악마가 그의 영혼을 가져간다는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학문에 좌절한 노(老) 학자 파우스트는 마법을 이용해 사건의 변전 속으로 휘말려 들어갑니다. 마녀가 준 영약을 마시고 20대 청년으로 회춘한 그는 순결한 처녀 그레첸을 당장 품에 안고자 합니다. 그녀는 파우스트와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어머니와 사생아를 살해하고, 오빠까지 죽게 합니다. 결국 광증을 일으킨 채 감옥에 갇혀 심판을 받는 비극을 맞습니다.
애인과의 비참한 체험으로 쓰러진 파우스트는 악마의 소생력으로 다시 깨어납니다. 그리고 시공을 초월한 봉건 제국 황제의 궁정으로 가지요. 지하의 보물을 담보로 지폐를 발행해 재정난을 구하고, 그곳에서 전개되는 정치생활에 끼어듭니다. 실권 없는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막강한 권력과 재력으로 온갖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인생의 빛과 그림자의 단면에서도 끝없는 실망만을 느끼게 됩니다.
그가 56년간 머물렀고 최고 지도자로 이끌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괴테는 이러한 허망함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인생길은 동서고금의 최고 미녀 헬레나와의 결혼생활로 이어집니다. 전원적 환경의 아르카디아로 가서 가정을 이루고 천재적인 자식을 낳게 됩니다. 무한을 추구하는 아들은 암벽에서 양팔을 펼치고 비약하다가 거꾸로 떨어져 죽고, 아내인 헬레나도 저승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녀와의 부부생활이 전개된 삶도 깊은 불만으로 끝나 그는 다시금 절망에 빠집니다.
메피스토펠레스, 마법사에 의해서 팔려간 파우스트의 인생은 절정의 쾌락과 욕망의 성취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기를 반복합니다. 그렇게 굴곡적인 삶이 주는 시사점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정점의 희열과 나락의 고통을 느껴야만 자신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우리가 인문학의 지혜를 얻게 되어야만 하는 이유들입니다.
파우스트는 이제 이상적인 삶을 위해 그의 남은 생애를 바칩니다. 인류를 위한 창조를 추구하며, 공공이익을 위해 살고자 합니다. 끝없이 전개된 바다를 밀어내고 만인을 위한 옥토를 만듭니다. 정원과 궁전을 짓고, 항구를 열어 무역을 하고, 수백만 인간에게 비옥한 토지를 개간해 줍니다.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사는 인생에서 고통을 느끼기도 하고,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눈은 멀지만 내면으로 밝아지는 정신 속에서 자기가 만든 땅 위에 오곡이 푸르러지고 수많은 백성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이런 이상향을 꿈꾸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예감하고, 어느 정도의 만족에 지속을 염원하는 파우스트, 그는 외칩니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하는 외침과 동시에 쓰러지고, 이 세상과 영원히 작별합니다.
가난한 백성을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도록 하는 노력에서 파우스트는 드디어 내면적 만족을 예감하게 됩니다. 이런 봉사하는 인생길이 우리 현대인들의 삶에도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파우스트가 여행을 하였던 그 여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될까요?
삶은 여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행에서 무엇을 만날 것인가? 어떻게 여행을 할 것인가? 어떻게든 돌아갈 것인가? 어떻게 HOW를 배우는 것도 인문학에서 배웁니다.
내가 누구인지 Who am I?를 묻기 위해서 멈추세요. 배를 멈출 만큼 인문학의 바다는 우리가 깨닫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노를 젓는 것을 멈추고 바다에 떠오른 별빛을 보기 위해 하늘을 보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괴테가 던진 질문이고 답변이 파우스트에 있습니다. 정치가로서도 한 국가의 최고의 총리 위치까지 성공하여 큰 공적을 남긴 괴테였지만, 그는 권력에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삶을 멈출줄 알았던 인문학사에서 진정한 초인 중에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은 사람과 예술에 대한 사랑이 가장 중요하였기 때문에 넘치는 열정의 탐구와 탐미 안에서 불꽃처럼 살았습니다. 파우스트의 인생이 꼭 괴테의 그것과도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