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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프맨작가 Apr 22. 2024

100-50, 결혼행진곡의 19세기 슈퍼스타 혁명가

종합예술인 천재 리하르트 바그너의 삶과 음악 


리하르트 바그너(1813~1993)는 


음악사에 있어서뿐 아니라 문학사, 공연사에서도 많은 영향을 준 독보적 예술가이다. 음악사에서는 초기 낭만파의 뒤를 이어 낭만파 음악을 대성한 음악인이며, 문학사에서는 신낭만파의 희곡 영역에 있어서의 거봉이었다. 또한 니체에게도 영향을 준 그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염세주의, 종교적인 신비주의, 탐미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으로 19세기 말 낭만주의 부흥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를 흠모하고 우정을 나눈 철학가가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니체는 바그너를 만나서 교류하면서 그들의 끈끈한 사상적 우정이 그에게 헌정하는 책 <비극의 탄생 1872>까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니체는 바그너와 결별하기에 이른다. 그가 <니체 대 바그너 1899>라는 책을 수 십차례 출판사와 수정 원고를 통해 출간한 것은 바그너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때는 이미 바그너는 저세상으로 떠난 후였다. 










왜? 바그너가 음악사적으로 문학적으로 큰 영향을 준 것인가? 


그는 악극이라는 혁명적인 음악의 창시자였다. 


오페라가 관객들에 끌려다니는 것을 거부하고 그는 관객들, 청중들이 악극에 집중할 수 있도록 창조하였다. 그의 음악적인 혁명도 눈부시다. 



리하르트 바그거의 음악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품은 <결혼행진곡>이다. 우리가 결혼식장에 입장할 때 그의 음악으로 어른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바그너(Richard Wagner)의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에 나오는 〈혼례의 합창(The bridal chorus)〉에 기초한 ‘신부 입장(Here Comes the Bride)’에 나오는 <결혼행진곡>은 우리의 결혼인생을 축복하는 음악이 되었다. 





              무한선율            



무한선율은 그의 총체예술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로 기존 오페라들의 폐해, 즉 번호 오페라(Number Opera)에서처럼 극과 음악이 분리된 번호들로 나누어져 연속성이 단절되는 것을 막기 위한 선율적 장치이다.


그의 대표작품중에서  오페라 <탄호이저>에서 무한선율이 들려주는 것은 그의 반음계의 불협화음이 조화를 이루는 극적인 선율을 창시하고 그의 음악의 특징이 됩다. 




유도동기(주도동기, 지시 동기, 라이트모티브)는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주제 악상을 가리킨다. 유도동기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그너가 오케스트라에 부여한 임무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바그너에 의할 때, 그의 음악극에서 성악은 사물의 외면을, 오케스트라는 그 본질을 표현한다. 오케스트라의 이러한 역할은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의 역할과 동일하며, 또한 쇼펜하우어가 말한 ‘음악은 의지 자체의 모사’라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의 사상은 수많은 문인들이 그들 존경하였다. 


<율리시스>의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마르셀 프루스트 등 수많은 문인들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가 직접 악극의 대본을 썼다. 바그너는 시인이자 작가였다. 그는 종합예술인이었다. 











바그너의 사상은 독특하였다. 


그는 예수를 존경하였으나 예수가 그리스 혈통이라고 주장하였다. 구약과 신약성경을 서로 무관하다고 하였다. 불교에 매력을 느꼈으며 반유대적인 사상을 내비쳤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작품을 연주한 것은 그의 유대인 친구인 레비의 지휘가 있었다. 또한 레비는 바그너의 장례식의 운구까지 마지막을 함께 하였다.   


바그너는 그리스 비극, 그리스 종교, 북구 (게르만족)의 신화 이야기들에서 그의 악극 스토리를 가져왔다. 









바그너는 13살에 비극을 쓰고, 19살에 최초, 유일한 교향곡 C장조를 작곡하는 천재였다. 


바그너는 혼자 배울 수 있다고 자퇴를 하였지만, 대학교에서 그의 입학을 받아준다. 


바그너는 스스로 천재성을 믿고 그의 젊은 시절을 개척한 사람이었다. 


20살에 시골 교향악단의 단장이 되는 업적으로 그의 음악 인생을 단숨에 높혔다.


하지만 바그너의 천재성을 그의 어록에서 만난다. 그는 그의 천재성을 굳게 믿었다. 


그는 유일하게 그것도 그의 말년에 베토벤만이 그의 경쟁자였다고 생각하였다. 






"운명의 여신은 모든 아이들에게 


천재가 되는 것을 선물을 주는데


보통은 그것을 거절한다.


그녀는 나한테 그것을 준 것 같다."


- 바그너의 어록 



바그너가 예술을 구분한 것도 특별하다. 



              무용, 음악, 시 : 인간이 주체이자 동인이라고 했다.             


              건축, 조각, 회화 : 자연에 대한 예술적 묘사라고 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베토벤 9번의 영감을 크게 받았다고 하였고, 셰익스피어의 스토리에 빠졌다. 



바그너가 논란의 위인이 된 것은 그의 음악을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의 음악으로 극찬하고 무조건적인 숭배를 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음악 연주를 금지할 정도가 되었다. 



바그너의 삶은 바이에른 왕국의 루드비히 2세 국왕의 후원을 받기 이전에 비참하였고 궁핍하였다. 46세의 그는 루드비히 2세의 후원을 받기 이전에 심지어 정치 혁명에 휘말려 12년간 망명 생활을 해야 하였고 빚더미에 가난하게 살아남아야 했다. 하지만, 바그너의 천재적 재능을 인정받는다. 그의 성공은 영광과 환희의 연속이었다. 그가 죽었을 때, 세상은 베토벤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 바그너를 예찬하게 된다. 




그는 실제로 이런 식의 음악적․시적 표현 수단들의 결합을 통해 독보적인 보다 고차원의 문학을 만들어냈다. 세계무대는 신화적 상상력에 덕입어 연극사에 있어서 시적으로 가장 위대한 것들에 속하는 인물들, 상황들과 정세들을 갖게 되었다. 바그너는 세계의 예술과 문화의 발전에 어마어마한 기여를 했다. 바그너가 끼친 영향은 오페라나 음악 분야에서 그친 게 아니다. 바그너는 현대 사상과 문화에 아주 커다란 충격과 변화를 주었고 그 때문에 음악과 예술은 물론이고 철학, 역사, 정치, 심리학을 연구하는 인물들도 바그너에 대해 평하기 바빴다. 


 









프리드리히 니체와 바그너의 만남이 주는 숭배와 비판이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그의 음악을 감상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바그너의 음악예술에 실린 그의 혁명적이고 독창적인 세계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가는 예술작품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19세기는 산업혁명과 더불어 문화사적 인문학적으로 혁명가들의 슈퍼스타 시대였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와 그리스 비극 등의 공감대를 가진 프리드리히 니체와 더불어 19세기 혁명의 주요한 위인이었다. 니체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바그너를 공부하고 그의 음악을 들어보아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쇼펜하우어와 니체도 현대 철학을 열게 된 철학자로 존경받고 있는 영향력을 준 위인이다. 


리하르트 바그너도 현대 음악을 열게 된 위대한 천재 음악가, 천재 종합예술이이었다.  


19세기는 수많은 인문학적, 예술적 수퍼스타들의 시대였다. 




<19세기 슈퍼스타들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연재합니다> 


호프맨작가는 이러한 인문학적 위인들을 화상모임에서 나눕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 무료 화상모임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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