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작디작은 집의 가장 큰 단점은 화장실이다.
이사 가기 전 우리는 집 화장실에 보일러를 설치했다.
전에 살던 주인은 아궁이를 썼으므로 집엔 보일러가 없었다.
여기는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이고 내가 이사한 때는 88년 올림픽이 끝난 1989년도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이런 집이 있었다.
우리 화장실은 집 밖에 대문과 나란히 있는 작은 샷시문을 달고 있었다.
대문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바로 시작되는 계단실 밑 공간이 화장실이었다.
첫해에는 집 안을 고치느라 화장실까지는 손대지 못하고 푸세식으로 써야 했다.
공마당에 살던 시절엔 정화조를 청소하는 차가 골목 끝인 우리 집까지 들어올 수 없어서
지게를 지고 오물을 처리하는 아저씨를 본 기억도 있다.
푸세식 화장실을 써보지 않았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화장실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거다.
무서워하는 우리를 위해 다음 해에 아빠가 그 자리에 정화조를 묻고 양변기를 설치해 주셨다.
잠시 한남동을 떠나 있을 때, 푸세식이 아닌 양변기를 사용해 봤으나 양변기가 집에 생긴 건 처음이었다.
얼마나 신세계이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문제는 나의 사춘기 시절부터다.
중학생이 되고 나니 동네의 남학생들이 하나둘씩 불편하고 신경이 쓰였다.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고, 어느 누구와도 인사하지 않지만, 난 신경이 쓰인다.
앞집의 개인택시집 남동생도 인사하고 싶지 않고
건너편 집 아들 셋 있는 집의 오빠들도 전혀 나를 모르지만 나는 아주 불편하다.
그중 가장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바로 옆집 기와집의 막내아들이다.
나는 이 친구와 동갑이었다.
전학 오고,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다.
그저 동네에서 그 아이의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로 그 친구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 기와집과 우리 집은 벽이 붙어 있었다.
그 친구의 집의 어느 방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으나
한 방의 창문은 우리 집 현관을 들여다볼 수 있는 쪽에 있었다.
즉, 우리 집의 모든 소리를 그 집에서는 들을 수 있다는 거다.
그 자체로 이미 나는 그 친구에게 발가벗겨진 느낌이다.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전혀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매우 불편했다.
그 불편함은 고등학교 때까지 지속되었다.
나의 장운동은 유독 학교 가기 전 등교 시간에 활발했다.
학교 갈 준비를 다 마쳤는데 화장실이 가고 싶은 거다.
나는 화장실에서 느긋하게 일을 본다.
점점 등교해야 하는 마지노선 시간이 다가온다.
하는 수 없이 그만하고 화장실에서 나오려는데
그 기와집 아이를 부르는 남자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만 들어서 3명 정도가 집 앞으로 왔나 보다.
하필이면 오늘, 이 시간인가?
나는 이제 학교에 가야 한다.
친구들이 옆집 아이를 더 크게 부른다.
아 그 아이도 오늘 늦나 보다. 빨리 나와서 학교 가지. 안 나온다.
그렇다고 우리 집 현관 앞에 서 있는 또래 남자아이들 앞으로
변기가 뻔히 들여다 보이는 화장실에서 나오자니 용기가 없다.
그들은 이 공간이 화장실인지도 놀랐을 텐데
내가 문을 열고 나가면서 우리의 하얀 양변기를 그들이 볼 것 같다.
도저히 용기가 안 난다.
가슴이 답답해져 오고 지각하게 될까 봐 걱정이 태산이다.
안 그래도 되는데 우리 엄마 친히 나의 이름을 또박또박 부르며 학교 가란다.
한 번만 부르지. 또 불러서 지각한단다.
‘아, 엄마.’
그 순간 구세주처럼 옆집 아이가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내 이름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휘리릭 출발한다.
그리고 나도 탈출한다.
이렇게 3년이 지나서야 우리 양변기는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