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다 보니 어느덧 오십 줄기의 마디 위에 있다. 생명을 준 누군가의 희생으로 자라 이 순간 존재하기까지 수많은 이의 손길을 마주하며 지나왔다.
하지만 젊은 시절 ‘나의 생명은 내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살면서 마주하는 부딪힘과 시련들과의 만남은 너무나 뾰족해서 때론 원망과 야멸찬 시선 속에 가두곤 했다. 믿음이 부서지고 다시 일으켜 세우기를 반복하는 아픔들이었지만 시간 위에 축적될수록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어주곤 했다. 그 시간이 세월 속에 흡수되어 나를 한층 단단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가꿔주었으니까.
젊은 시절 ‘왜 나에게만 이런 아픔이 올까?’라는 아집에 갇혀있기도 했다. 어느 날 무심히 찾아온 손님처럼 그것은 신이 나를 시험하기 위한 하나의 테스트였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 순간이 돈오하고 점수하는 찰나였다.
나쁜 것이 모두 나쁜 것이 아니고, 좋은 상황이 모두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었다. 시간 위에 새겨지는 기억을 돌이켜보면 주어지는 상황에 일희일비하는 것을 내려놓게 되었으니까. 어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항상 고통스러운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는 이치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육체의 노화를 동반한다. 하지만 정신의 노화는 삶을 살찌우는 깨달음의 향연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어리고 젊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게 해 주었다.
물론 이런 시각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얻어지는 건 아니다. 세상엔 공짜가 없듯이 그러한 이치를 깨닫는 것 또한 세월의 고통을 어떻게 마주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주어지기 때문이다.
주어진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순리에 따라 적응하며 꺾이지 않는 부드러움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들판의 거친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며 잘 살아내듯 우리도 자기만의 들판에서 수많은 풍파와 맞서며 흔들리며 살아내는 이치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나에게 축복이며 삶의 깨달음을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십 줄기의 지금보다 육십 줄기를 기대하는 이유이다. 좀 더 편안하고 유연한 시선과 사고로 세상과 마주하게 될 시간이 내 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때 마음의 풍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나이 듦은 노화의 단어를 넘어서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이다.
내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조금씩 알아가는 시절이 참 좋다. 허상이 아닌 실존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 그것은 고통을 수반한 시간만이 주는 인생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 아픔 속에서 걸어 나올 수 있을 때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이왕이면 나에게 어떤 아픔이든 오길 바란다. 감사히 마주하며 기다려 본다. 그 시간이 나를 성숙시킬 것이므로. 자유로운 흔들림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