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4개월이 흘렀다.
'한 달 안에 퇴사를 되돌려놓고 싶은 후회와 불안감으로 가득 찰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지금 나는 생각보다 여유롭다.
권태인지 여유인지 구분은 안 가지만..
나의 첫 직장이자 전 직장은 미디어업계 공공기관이었고, 약 1년 8개월을 재직했다.
2년을 채우지 못했으니, 나는 경력이 아닌 ‘중고신입’으로 새 출발해야 한다.
“고작 4개월만 버티면 그래도 2년은 채우는데,
그것도 못 버티겠니?”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강한 Yes' 였다.
사실 2년을 채운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첫째로는 한국 취업시장에서 경력으로 인정해주는 것은 최소 3년부터 시작될 텐데, 박살나버린 멘탈을 이끌고 억지로 버텨 얻어낸 2년 경력 한 줄이 과연 값어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둘째로는 ‘자아정체감의 상실’이었다.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앞으로의 글들로 보충할 예정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와 ‘공공기관’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도 컸다. 한 번 벌어져버린 간극은 더 이상 좁히기 힘들어졌다.
나는 대학시절 동안 ‘미디어/콘텐츠 외길인생’을 걸어왔다. 콘텐츠가 좋고, 방송이 좋고, 미디어 학문이 좋아서 시작한 길이었다.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가라면 자신이 없을 정도로 치열하고 열성적으로 관련 경험을 쌓아왔다. 때문에 좁디좁은 한국 취업시장에서 미디어업계 공공기관의 합격소식은 너무나도 귀하고 소중했다. 하지만, 합격의 달콤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입사하자마자 ‘신입’이었던 나는 다른 팀으로 발령 나신 ‘부장님’의 업무를 떠맡게 되었고, 제대로 된 인수인계는 1시간도 채 받지 못했다. 사내 시스템 조차 파악을 못한 상황에서 민원 전화까지 나를 쉴 틈 없이 괴롭혔다. 주위의 말을 들어보니 이러한 인수인계 부재의 문제는 공공기관에서 비일비재한 케이스라고 한다. (물론 아닌 기관/팀/사람들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진리의 부바부, 팀바팀이기에..) 머지않아 나는 공공기관이 어떤 특성을 지니는 곳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1. (일) 욕심이 크면 힘들어지는 곳
2. 새로움을 경계하는 곳
사실 1, 2번 모두 사람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이전에 인턴/아르바이트로 잠깐씩 몸 담았던 사기업과는 워라밸 측면에서 확연히 달랐다. 야근이 일상이 아닌, '칼퇴'가 일상인 분위기였고, 연차 또한 나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가 1, 2번의 원인이 되었다. 크게 성과를 내지 않아도 안정적인 회사생활이 가능하기에, 일을 크게 키우는 것보다 '과거 프로세스대로 안정적으로 끌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성과에 대한 보상 측면에서 사기업보다 약하기 때문에 '일 욕심이 많은 사람'이나 '일 욕심이 제로인 사람'이나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때문에 일을 열심히 할수록 왠지 모르는 억울함이 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업무를 계속해서 아랫 직급에게 떠밀거나, 일을 책임지기보다는 전가하는 것에 도가 튼 상사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퇴사 욕구는 점차 짙어졌다. 사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어느 회사에서나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유형이다. 하지만 공공기관의 안정성을 방패 삼아 본인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은 내게 적잖은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퇴사를 하는 과정에서 나의 회사 선택 기준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과 일을 통해 내가 얼마나 성장을 할 수 있는 곳인가' 였다. 이전 직장의 경우, '개인의 나'가 새로운 업무를 개척해나가며 커리어 측면에서 확실히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치열하게 업무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 일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선배는 극히 적었다. 더욱 넓은 사회를 모험하고, 배우고, 흡수할 각오가 되어있음에도 함께 속도를 맞춰주는 이가 없어 어느 순간부터 미운 오리 새끼가 된 듯한 느낌이 나를 감쌌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나와 결이 맞는 곳을 찾자고 결심했다. 이전 직장은 옳고 그름을 떠나 '나와 결이 다른 곳'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적은 나이일 수도, 많은 나이일 수도 있는 이 시점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보고자 한다. 이 여정이 6개월이 될지, 1년이 될지, 5년이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아무렴 좋다. 나의 선택이 최고의 선택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하루하루 살아나가고자 한다. 뚜벅뚜벅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