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50분 승강장에는 출근길에 오르기 위해 삼삼오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직장인, 학생, 어르신 등 저마다 각자의 행선지가 있다. 이 무리 속에 속한 나는 약대 합격 후 초창기에 등교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뿌듯했었다. 긴 수험생활로 인해 갈 곳 없는 신세에서 가야만 하는 곳이 생겼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이 흥겨움에 취한 나머지 아침에 사람들이 빼곡한 지옥철은 나에게만큼은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고마운 수단이었다. 이 감사함은 지금도 잊히지 않지만 나는 등굣길 여정이 즐겁지만은 않은 순간도 맞이하였다.
내가 약대에 입학할 때 조건 중 하나는 대학교를 적어도 2년 수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와 같이 약대를 다닌 동기나 선후배들은 모두 대학생활을 경험하고 왔다. 즉, 수능을 쳐서 대학에 갓 입학한 풋풋한 새내기 느낌보단 대부분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입학한 사회인들이다. 우리는 어느 집단에 속하기 위해 자신의 고유성을 잠시 내려두고 그 안에서 어울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을 잘하는 사람은 어느 집단에서든지 환영받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초기에 나는 집단에서 환영받으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서서히 나만의 고유성을 찾으며 잔잔한 소외감을 느끼는 길을 선택했다.
‘마셔라! 마셔라!‘를 외치며 그놈의 어깨춤은 언제까지 추게 할 거냐는 술자리 모임은 대학생이라면 한 번쯤 거쳐야 하는 필수코스다. 하지만 '본태적 알쓰'였던 나는 소주 4잔에 영혼이 가출했기에 어느 자리를 가도 소주 한잔 쪼개 먹기 신공으로 버텼다. 술자리의 묘미는 어색한 이들과도 술의 힘을 빌려 ’ 하하호호‘ 즐거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난 이런 자리가 불편했다. 모두가 즐거운 분위기라 나도 어울리기 위해 손뼉 치며 웃어봤지만 그것이 나의 즐거움은 아니었다. 긴 수험생활로 인해 혼자 지냈던 기간이 길어서 사회성이 부족해진 건가라고 생각하며 자책도 했었다. 모임에서 마주한 내 모습의 여파로 난 학교 사람들을 대하는 것 자체에 어려움을 느꼈다. 눈 마주치며 인사하는 것, 대화하는 것, 같이 밥 먹는 것, 타인과 일상을 보내는 것이 나에겐 점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약대에 입학하면 모든 것이 순탄하게 흘러갈 줄 알았던 나는 당혹스러웠다.
"화난 줄 알았어"
학기 초에 나를 처음 마주한 동기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그리고 동기들은 지나가면서 나에게 농담처럼 ‘화났나?’라는 질문을 하곤 했다. ‘화’가 나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 이유는 ‘나의 표정’과 ‘퉁명스러운 말투’때문이었다.
어느 날 나는 아르바이트 경험을 하기 위해 호텔 서빙을 한 적이 있었다. 일일 알바였기에 부담 없이 서빙을 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지배인이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혼자 조마조마하며 그에게 달려갔다. 주방으로 나를 데려간 그는
“친구야. 어디 불편해? 표정이 왜 그렇니?”
라는 질문을 나에게 했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아니라고 답했다. 그는 나에게 서빙 대신 주방 일을 하라고 지시하고는 나가버렸다. 이 순간 나는 수산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생선 대가리의 눈을 하고는 충격에 휩싸인 채 주방 일을 했다.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자괴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내 안의 나와 제대로 호흡하기까지
약대 입학 전까지 나는 세상과의 소통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었다. 소통이라면 자신과의 대화에만 몰두하며 지내왔던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과의 소통 법을 익히지 못한 채 사회에 나갔다. 때가 되면 사람 대하는 것도 능숙하게 잘할 거라며 호언장담했지만 나의 오만이었다. 무엇이든지 경험이 뒷받침되면 좋기에 나는 일부러 낯선 모임을 찾아다녔다. 일회성 및 정기적인 모임에 가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나는 '내향인 인간'이라는 거였다.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를 얻는다는 외향인들과는 다르게 나는 모임을 가질 때마다 피곤함에 절여졌다. 그래도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익혔다는 것은 커다란 수확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과 동시에 내가 따로 노력했던 것이 있다. 바로 ‘안면 근육운동’이다. 나의 무표정은 상대방에게 화가 났냐는 비언어적인 오해를 불러일으켰기에 개선이 시급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축 쳐진 나의 입꼬리를 사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아침에 거울을 보면서 작은 소리로 ‘개구리 뒷~다리’를 외쳤다. 경련이 생기고 마비가 올 것 같았지만 잠시나마 근육을 붙잡을 수 있었다. 붙잡는 시간이 1분, 2분, 3분으로 늘어나면서 입꼬리에 작용하는 중력에 대항하는 힘이 생겼다. 이러한 의식적 행동이 나의 무의식에 뿌리 박히려면 실생활에서도 꾸준히 연습해야만 했다.
의식적으로 미소를 짓다 보니 깨달은 것이 2가지 있다.
1. 올라가는 입꼬리에 비례해서 나의 눈도 같이 웃게 된다.
2. 표정 변화가 마음의 변화까지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근육은 다 이어져있기에 미소 지으면 눈 근육도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입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눈은 가만히 있는 것이 구조상 더 불편하다. 그래서 입꼬리를 올리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러운 눈웃음은 덤으로 따라오게 된다. 더불어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얼굴을 활짝 펴는 연습을 하다 보니 움츠러들었던 내 마음 근육도 서서히 활짝 펼쳐졌다. 그 결과 내 목소리를 전달했던 투박한 말투도 점점 부드럽게 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와 너로 이루어진 세계에 살지만 자폐인은 나로만 이루어진 세계에 사는데 더 익숙합니다. 사람들이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자꾸 잊어버려요. 그래서 매 순간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를 외치며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줬던 우영우 변호사가 한 대사다. 자폐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나만의 고유한 색깔을 나타내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색깔이 너무 독특하거나 진하면 다른 색깔과 조화가 안되기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나는 나만의 색깔에 흠뻑 취해서 내 세상에만 몰두한 기간을 길게 보냈었다. 아쉬움이 남지만 후회는 없다. 그 시절 경험하지 못했던 다양한 색채를 비어있던 나의 배경에 하나씩 입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우영우 변호사와 같은 시절을 거치는 거 아닐까?
나는 앞으로도 내 안의 우영우와 같이 호흡하면서 다양한 색깔을 경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