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어느 봄날이었다. 약국 안에서 근무만 했기에 전혀 알 수 없었던 따사로운 햇살을 점심 식사를 한 뒤에 잠시 맞이하였다. 몇 분 안 되는 시간이지만 햇살을 바라보고 느끼는 행위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그렇게 짧은 설렘을 간직한 채 오후 근무를 하기 위해 약국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폰으로 문자메시지 한 통이 전송됐다.
밀리의 서재에서 지난 3월에 지원했던 나의 원고가 우수 작품에 선정됐다는 내용이었다.
2년 전 브런치에서 작성했던 나의 보물[매일 아침 나는 피를 본다]가 조금이나마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나에게 설렘을 선사해 주었던 햇살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감사하게도 나의 마음을 데워주는 또 하나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나의 글을 통해 위로를 받았으면 해서 시작했던 글쓰기가 현재 나에게 심심한 위로를 선사해 주고 있다.
'1형 당뇨'라는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쓴다는 것은 실로 나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엔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고 거기에서 느꼈던 슬픔을 토해내듯이 글을 작성했다.
이 초안을 읽었던 상대방은 너무 자신의 감정에만 빠져있는 거 같아서 읽는 게 힘들다고 전해주었다.
아... 내가 너무 자기 연민에 빠져있었구나
초안을 작성하고 내가 얻은 깨달음이다.
글쓰기란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가장 대표적인 소통 방식이다.
즉, 누군가와 소통을 할 때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해서 전달하는 것이 좋다.
나의 슬픔을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면 청자도 이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글도 똑같다.
슬픔이란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기보단 정제와 가공을 거쳐서 전달했을 때 상대방이 진정으로 저자의 슬픔에 공감한다.
하지만 정제해서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더불어 나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란 우려도 있었다.
그렇게 창작의 고통과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작가로서의 삶을 갈망했던 과거의 나는 글쓰기를 '열심히' 하려고만 했다.
반면에 지금은 '충실히'하려고 한다.
2년 전에 작성했던 나의 원고가 지금에서야 빛을 받은 것을 보면 무엇이든지 될 때까지 하면 된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