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 어지러워.. 쓰러질 거 같애.." 엄마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앞 좌석 손잡이를 잡고 머리를 기댔다.
나는 안절부절 했다. 미리 날씨를 검색해 봤을 때 여행할 곳들의 날씨는 한국보다 훨씬 낮은 기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최근 한국에 미칠 듯 한 폭염이 장기간 이어지고 있었는데 밖을 걸어 다니기도 힘들 정도였다. 오후 한창 시간대는 몇 발자국만 잠깐 걸어도 온몸에 땀이 흘러내리고 겨드랑이가 축축해지고 정신이 나른해질 정도였으니까.
그런 날씨에 건강이 안 좋은 엄마는 더 괴로워했다. 매일 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어지럽다면서 10분 정도는 선풍기 앞에서 못 일어나고 눈을 감고 주저앉아있었다. 그런데, 이곳도 그렇다고? 맙소사. 나 역시 더위에 지쳐 늘어졌는데, 엄마를 보니 심각한 것 같았다. '이거.. 여행하다 못 견디는 거 아냐..' 걱정이 또 스물스물 올라왔다.
우리뿐 아니라 여행자들이 모두 덥다고 성화를 부렸고 버스 기사님은 에어컨을 아주 빵빵하게 틀어줬다. 뜨거워진 몸에 열들이 어서 가라앉길 바랬다.
버스가 다음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우리는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 이 세 개 나라를 방문한다. 코스는 체코-오스트리아-헝가리 순. 먼저 부다페스트 공항에서 여행 출발점인 체코 프라하까지 이동해야 하는데, 거리가 꽤 멀어서 오늘은 그 사이에 있는 체코의 작은 시골마을 비토프라는 지역에서 하루 묵어야 했다.
공항에서 멀어질수록 너른 들판과 산들이 보였다. 거대한 풍력발전기들이 돌아가는 것도 봤다. "엄마, 저기 봐. 산 너무 멋있다. 하늘 엄청 파랗다. 구름 장난 아니게 이쁘네. 풍력 발전기 봐. 가까이서 보니까 되게 크네." 엄마의 텐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틈만 나면 말을 걸었다. 내가 옆에서 조잘거리니 엄마는 처음 보는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더 열심히 봤다.
그러다 넓게 펼쳐진 해바라기 밭을 여러 번 만났다. "어머머!! 저기 해바라기 좀 봐!" 흥분한 엄마가 크게 소리치는 바람에 피곤해서 졸던 다른 여행자들은 깜짝 놀랐고, 우리처럼 바깥 풍경을 바라보기도 했다.
며칠 후 방문할 오스트리아 빈도 지나쳤다.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강이 그 유명한 도나우 강입니다." TV에서 건 어디에서건 일단 많이 들어봤던 강인지라. 둘은 창문에 딱 붙어 목을 빼고라 그 강을 바라봤다. 별 것 없었는데.
공항에서 오후에 출발해 4시간을 넘게 달리니 저녁 시간에 가까워졌다. 국경을 넘어 체코 지역으로 들어가 비토프에 다다를 땐 해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시골 마을의 노을이 어찌나 예쁜던지. 푸른 들판과 울창한 나무, 작고 소박한 집들 사이로 붉은 노을빛이 어울려지는 풍경에 엄마는 "어머, 동화 같애" 라고 말하며 눈을 못 떼지 못했다.
어둑해지기 직전 버스가 숙소에 도착했다. 푸르고 큰 나무들에 둘러 쌓여있는 작은 호텔이었다.
'됐다, 됐어! 나 오늘 할 일 다 했어.' 호텔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으로 큰 일 치렀다 싶었다. 집부터 출발해 오는 동안 긴장하고 잠을 제대로 못 잤던 나는 로비 입구에 발을 딛자마자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옴을 느꼈다. 눈을 뜨고 있기가 너무 힘들었다. 눈꺼풀이 이렇게 무거울 수 있는 건가. 뜰 때마다 눈꺼풀 주변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룸으로 가기 전에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야 한다고 해서 앉았는데 숟가락과 포크를 들 힘이 없었다. 먼저 나온 치킨 수프를 먹고, 본 메뉴인 치킨 스테이크, 후식으로 작은 조각 케익이 이어서 나왔는데. 입맛이 영 없었다. 깨작거리기만 하고 먹질 못했다. 그런데 엄마는 앞에 앉은 모녀 여행자와 한창 이야기를 하고 음식도 다 싹싹 먹고 내가 남긴 것까지 깨끗하게 먹었다. 아니, 엄마는 또 어떻게 체력이 남아있는 거야.
"맛있어?"
"응. 맛있네. 이건 입에 맞네."
"다 입에 맞대.. 유럽 체질 맞네."
식사시간이 왜 이리 길게 느껴지던지. '아.. 제발 빨리 올라가게 해 주세요.' 빨리 침대에 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들 줄 서서 룸 키를 받았다. 겨우겨우 지친 몸을 이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룸은 널찍하고 좋았다. 시설이 오래된 것 같지만, 나름 분위기 있다고 해야 하나. 화장실도 따로 있고, 샤워실도 따로 있고. 침대도 크고 방도 크고. 나는 씻지도 않았는데 일단 침대에 누웠다. 그냥 뻗었다.
"여기 좋네. 욕조도 있나?" 먼저 캐리어를 풀고 씻겠다던 엄마는 샤워실을 한번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외쳤다. "왔싸!!!" 앗싸도 아닌 아싸도 아닌 왔싸. 그리고 두 팔을 마구 휘둘렀다. "반신욕 해야지!"
여행을 하면서 내내 놀라는 일이 많았는데. 이 모습도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 중 하나였다. 왔싸라니.. 엄마의 들뜸에서 아이 같은 면이 또 느껴져서. 순수 그대로의 신났다는 반응이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에서. 나는 놀랐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씻겠다고 샤워실에 들어간 엄마가 샤워기가 고장난 것 같다고 나를 부르는 거다. 엄마의 목소리는 하이톤이고 성량이 굉장히 크다. 아무리 해도 작동이 안 된다며 화가 난 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꾸역꾸역 지친 몸을 일으켜 들어가 보니 엄마는 이미 짜증이 한껏 나있었다.
"이거 고장 났나 봐. 안 돼. 아휴, 네가 해봐!" 수도꼭지를 조절하면서 샤워기 밸브에 물을 틀려는데 이리저리 만져 봐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하도 힘을 줘서 손가락에 무리가 와 아플 지경이었다.
"이거 안 되겠다. 방법을 모르겠네. 일단 욕조 물 받아서 씻어. 내일 물어볼게."라고 했다. 도저히 밖에 나가서 물어볼 힘이 없었다. (나중에 안 건데. 물을 틀기 전에 수도꼭지를 올리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물을 튼 상태로 계속 만져서 작동이 안 된 것이다.)
"아휴 진짜. 하필 왜 고장 난 방을 줬어! 정말 운이 나빠."
"아니... 뭐가 운이 나빠!" 너무 피곤한데 짜증이 몰려왔다. "일단 씻어. 그리고 부정적으로 말하지 마. 왜 그렇게 말해. 잘 오던 운도 도망가게."
내 말에 엄마의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너는 왜 내가 말만 하면 그래! 말도 못 하게 하고!" 남은 기력들이 어디 숨어있다 나오는 건지.. 엄마는 갱년기가 온 이후로 더 쉽게 짜증을 부리고 화를 냈다.
우리 두 사람의 목소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끝도 없이 위로 솟아올랐고, 번개 부딪히듯 꽝꽝하고 부딪혔다. 피곤하다 그만 좀 하자 해도 끝이 나지 않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싸울 줄 알고 안 오려고 했었는데! 네가 꼬셔가지고! 친구들도 싸우면 어떻게 하냐고 했는데! 정말 괜히 왔어!" 엄마의 '괜히 왔다'는 말에 나는 너무나 서운해져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샤워실로 가자 상황이 종료됐다. 다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아... 미치겠다. 첫날부터.. 첫날부터 이러면 앞으로는 어쩌냐고...' 밑도 끝도 없이 머릿속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