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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삭 Sep 13. 2024

하얀 눈꽃송이가 떨어진 꽃밭

2024년 6월 말, 엄마와 함께 8박 9일간 동유럽 여행을 떠났다.

생각지도 않았던, 순전히 나의 충동적인 결정으로만 시작된 여행에서 

우리는 조금은 가까워져 돌아왔다. 이 글은 그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는데 아침이 되어있었다. 나는 꿈 한번 안 꾸고 기절을 하고 잤다. 부지런히 씻고 준비를 했다. 빠르게 식사를 마친 다음 체크아웃을 하고 약속된 시간까지 버스에 타야 했으니까. 


 하얀 커튼을 치고 커다란 나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상쾌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밖을 내다보니 호텔을 둘러싼 진하고 푸른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고 새소리가 들렸다. "날씨 겁나 좋네." 이곳에서 하루 묵어가는 건 나쁘지 않았다 싶었다. 


 "나는 3시간 밖에 못 잤어. 시차 적응 못해서 그런지." 뒤이어 씻고 나온 엄마가 말했다. 그리고는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계속 조잘조잘 말을 걸었다. "유럽이 나랑 맞나 봐. 컨디션은 또 괜찮아."


 항상 이렇다. 나는 어제 쌓인 감정을 아직 씻어 내지 못했는데, 엄마는 뭔 일 있었냐는 듯 말을 건다. 그럼 나는 '잊자 잊어.' 하고 넘겨버린다. 시끄럽게 대판 싸우고 아무렇지 않은 듯 넘어가는 게 우리 일상이다.


 프라하로 이동해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풀어놓은 짐을 다시 챙기며 오늘 어디를 여행하는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을 볼지. 엄마한테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짐을 다 싸고 식사를 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레스토랑 문은 아직 닫혀 있었다. 너무 일찍 내려왔나 싶었는데, 두리번거리고 있는 우리를 보고 직원이 준비 다 됐으니 들어와 먹으라고 했다. 


 어떤 숙소를 가든 조식이 어떻게 나올지는 항상 궁금하다. 뭐가 있나 살펴보니 다양한 종류의 빵, 스프, 소시지, 햄, 샐러드, 치즈, 케익, 쿠키, 과일, 커피, 우유, 주스 등이 준비 돼 있었다. 골라 먹을 선택지도 많았고 양도 많았다. '잘 나왔네, 실컷 먹어야겠다.' 이 정도면 대만족이었다.


 엄마는 도시락 가방에 챙겨 온 김과 멸치를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리고 직원에게 가서 전자레인지에 햇반을 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야채랑 과일을 많이 먹어야 한다며 접시를 들고 내 옆에 섰다. 


 "이건 뭐야?"

 "빵이랑 같이 먹는 치즈, 이건 그냥 먹어도 되는 치즈인데. 엄청 짜."

 "이건 뭐야." 


 엄마는 이건 뭐냐고 물으면서 계속 접시에 음식을 담았다. 안 먹는다던 빵도 싫다던 햄과 소시지도. 맛은 봐야겠다며 담고 또 담았다. 내 접시보다 엄마 접시에 담긴 것들이 배로 많았다. 

  

 "적당히 담아. 남기면 아깝잖아."

 "다 먹을 수 있어. 나는 영양을 보충해야 돼. 안 그럼 어지러워."


 엄마는 요거트도 커피도 알차게 다 챙겨서 테이블로 가져왔다. 햇반이고 김, 멸치. 저것만 먹어도 배부를 거 같은데, 저 접시에 있는 걸 어떻게 다 먹냐고.. 


 하지만, 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엄마는 입에 맞는다며 맛있게 잘 먹었다. 정말 맛있게 다 먹었다. 앞에서 몇 번 말했지만 엄마는 진짜 유럽이 체질 일 수도 있다. 음식 걱정은 더 이상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프라하로 출발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호텔 직원이 나와서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인사한다! 너도 손 흔들어줘!" 엄마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직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직원이 웃으면서 화답해 줬다. 옆자리에 앉은 엄마를 쳐다보니 엄마는 양손을 신나게 흔들고 있었다.


 버스가 시골길을 달렸다. 아침에 다시 본 마을의 풍경은 소박하고 평화로웠다. 구불구불하고 작을 길을 지나며 100년은 더 된 것 같은 오래된 집들을 지나쳤는데, 창가에 예쁘게 장식된 제라늄 화분들과 잘 관리된 작은 정원이 오래되고 소박한 집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 같았다. 


 전날 헝가리에서 이동할 땐 어마어마하게 넓은 해바라기 밭이 우리를 감탄시켰는데, 오늘은 끝없이 펼쳐진 하얀 꽃밭이 우리를 감탄시켰다. "어머, 저건 무슨 꽃이야?" 자세히 보니 하얀 양귀비 밭이었다. 


 버스에 탄 일행들은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바라보았다. 온통 하얀 꽃밭, 파란 하늘과 커다란 뭉게구름. 정말 그림 같았다. 


 "마치 하늘에서 눈 꽃송이가 떨어진 것만 같아."


 '뭐라고?' 창밖을 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반대편 좌석에 앉아있는 엄마를 쳐다봤다. 멍하니 창밖을 보는 엄마 입에서 튀어나온 말. 이 한 문장이 마치 '시'처럼 들렸다. 엄마가 이런 말을 할 줄 아는구나. 이런 표현을 할 줄 아는구나.. 낯선데 가슴이 뭉클했다.


 잠깐 자다가 일어나니 프라하에 도착해 있었다. 프라하를 상징하는 주황색 지붕들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 저기 봐. 저기 큰 기차역이 프라하 중앙역이야. 서울로 치면 서울역 같은 거." 

사진으로만 봤던 프라하 중앙역을 지나며 난 약간의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도 처음이지만 나도 처음 방문한 프라하. 이 도시는 어떤 곳일지 기대가 됐다.


 우리는 한식당에 가서 먼저 식사를 하고 관광에 나설 예정이었다. 식당을 가기 위해 버스에 내렸다. 주변을 둘러봤다. 레몬색, 분홍색, 연하늘색 파스텔 톤 건물들이 너무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었다. '서유럽은 엄청 화려했는데, 여긴 또 이런 느낌을 주는 곳이구나.' 새로웠다. 


 "엄마, 저기 봐. 빨간 트램이야!" 손가락으로 길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 빨간 트램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는 건물도 봐야 하고 트램도 봐야 하고 정신이 없었다. 


 식당에 도착했다. 테이블 위에 미리 음식들이 세팅되어있었다. 단 하루, 한식을 안 먹었는데 그게 왜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어제 식사를 같이 한 모녀와 버스에서 우리 뒷자리에 앉는 부부와 함께 식사를 했다. 낯을 가리지 않는 엄마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엄마, 그냥 먹어.." 말이 너무 많아서 혹시나 실례가 될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말렸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식당 앞 정면에 보이는 레몬빛 건물이 참 마음에 들었다. 엄마와 나는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같이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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