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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로움 Oct 17. 2020

현대 미술의 출발점 프란시스코 고야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초상화>

스페인의 대표적 낭만주의 화가는 프란시스코 고야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그는 고전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인상파의 시초를 보였다. 그의 파괴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대담함 붓의 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마네와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Francisco Goya 프란시스코 고야는 1746년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푸엔데토 도스에서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야의 아버지 프랑크는 도금 업자였으며 처가에서 살아야 할만큼 살림살이가 좋지못했다. 그래서 고야는 어린 시절을 어머니 집안에서 보냈다. 고야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는데, 그의 그림은 그림을 짜 넣은 직물 형태의 장식물인 태피스트리(tapestry)디자이너로 그림을 시작했다.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카를로스 4세(Charles IV of spain)의 궁정화가 된다. 그는 많은 인물화들을 남겼는데, 태피스트리 그림과 궁정화가로 있던 때의 그림에서는 밝은 느낌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말년 귀머거리가 된 이후 그의 그림에는 어두움과 공포가 가득하다.

고야는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였던 벨라스케스를 존경했다. 그래서 초기에는 밝은 로코코 양식의 그림을 그렸으나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판화 작업하며 낭만주의에 스페인의 예술 감각을 더해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했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도 나타나듯이 벨라스케스의 작품인 <라스 메니나스(시녀들)>작품과 유사한 형태로 그렸다. 작품<시녀들>처럼 고야도 화가인 자기 자신을 그려 넣었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을 보면 화려한 옷과 갖가지 보석, 여러 가지 훈장을 볼 수 있는데, 언 듯 보기엔 화려한 옷과 왕실의 권위와 부귀를 나타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카를로스 4세의 얼굴을 보면 우매한 얼굴로 그렸다. 이 그림에서는 풍자와 비판의식이 숨어 있다. 

카를로스 4세는 정사에는 관심 없는 무능한 왕이었다.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이라는 혼란스러운 격변기에 시의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였고 사실상 왕비 마리아 루이사와 그녀의 정부 마누엘 고도이의 손에 국정을 맡겨 나라를 패망으로 이끌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불평등한 조약을 맺었고 나중에는 나폴레옹의 형에게 나라를 빼앗겨 외국으로 망명해 살았다. 그러니 고야를 비롯해 백성들에게 존경받을 수 없는 왕이었다. 고야는 그림을 통해서 시대상을 표현했던 화가였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초상화>에서 앞서 말했듯이 그림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왕가의 사람들이 우아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야는 왕가의 사람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의 중앙에는 왕이 아닌 왕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왕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보통의 왕실 초상화와 다른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왕비를 예쁘게 그린 것도 아니다. 왕비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입에 잘 맞지 않는 틀니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그녀는 어린두 자녀를 곁에 두고 있는데, 루이사왕비가 낳은 아이들 중에는 애인이었던 고도이의 자식도 있을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카를로스 4세 뒤에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왕의 남동생이고 그 옆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공주 부부가 있다. 그림을 자세히보면 아기도 자세가 어딘지 이상하다. 당시 왕족들은 권력 강화와 유지를 위해 근친혼을 했는데, 근친혼의 부작용 때문에 아기의 척추가 선천적으로 휘어져 태어났던 것이다. 

그림 왼쪽에 파란 옷을 입은 남자는  페르난도 7세가 되는 페르디난트 왕자이고 그 뒤에 얼굴에 큰 점이 있는 여자는 왕의 여동생이다. 마치 마귀할멈 같은 외모를 하고 있다. 그 옆에는 얼굴을 돌린 채 보여주고 있지 않은 여자는 나중에 왕세자비가 될 나폴리에 공주 마리아 안토니오로 보는 설이 있다. 고야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해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 왼쪽에 어둠 속에 숨어있듯이 있는 사람은 고야 자신이다. 그는 거대한 캠퍼스를 앞에 두고 있는데, 이런 구도는 그가 존경했던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이라는 작품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렇다면 고야는 당시 화폭에 그리지 않아도 되는 아기까지 그려 넣었는데 이유가 뭐였을까? 왜 그랬을까???

동양에서는 4를 불길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서양에서는 13을 저주의 숫자로 생각한다. 그래서 아기까지 그려 넣어 13명의 사람을 맞추어 그려 놓았다. 이 작품은 왕의 무능을 비꼬아 그린 풍자화에 가깝다.

왕은 고야에게 왜 자신이 중앙에 있지 않냐고 묻자, "왕께서는 어느 누구보다 한발 앞에 나와있지 않습니까"라는 말에 왕은 흡족해하며 고야를 더 신임했다고 한다.

이 그림이 최고의 초상화로 여겨지는 이유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무능하고 부패한 내면까지 엿볼 수 있기 때문다. 궁정화가로서 우매함과 문란했던 왕가의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본 고야는 우매한 왕을 가장 예술적으로 표현하면서 비판의식과 풍자를 교묘하게 감춰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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