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풍요로움 Oct 18. 2020

<1808년5월3일><마드리드의1808년5월2일>

절대 낭만적이지 않은 낭만주의 스페인의 흑역사

고야의 또다른 작품 <1808년 5월 3일>과 <마드리드의 1808년 5월 2일>은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 왕자인 페르디난도 7세Ferdinando VII를 쫓아내고 나폴레옹의 형에게 스페인의 왕 자리를 주었는데, 1808년 5월2일에 이에 반대하는 마드리드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사건으로 하루만에 나폴레옹의 군대가 잔인하게 시민들을 진압하고, 다음날인 1808년 5월 3일 안타깝게도 마드리드의 시민들을 처형한다. 이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궁정화가 고야가 그날의 참혹한 현장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 Charles IV의 수석궁정화가였던 고야는 초기에 밝은 로코코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바로크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은 로코코 미술은 성경과 신화 내용이 사라지고, 미술시장의 고객인 귀족과 부유층의 일상과 그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들을 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잠깐 바로크의 어원을 살펴보면 바로크란 포르투갈어의 고르지 못한 진주라는 뜻이다. Perola Barroca 페홀라 바호카에서 나온 말인데 프랑스어로 바로크Baroque가 된 것이다.


미술시장의 주 고객이 귀족과 부유층이다보니 내용이 많이 가벼워졌다. 바로크 미술을 통해 얻은 빛을 표현하는 기법에서 새로운 색들을 보게 되었고 작품이 굉장히 밝으며 화려해졌다는 것이다. 고야는 밝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의 그림을 그리다가 벨라스케스의 영향을 받아 낭만주의에 스페인의 예술 감각을 더해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했다.


낭만주의 작품은 전혀 낭만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낭만주의는 번역 과정에서 생긴 오해로 원래의 뜻은 '생각 속을 헤매다'라는 뜻의 라틴어 알루키노스가 비슷한 뜻으로 '비현실적인 요소'라는 고대 프랑스어 로망즈romanz에서 유래했다. 다시말해 낭만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로맨틱한 모습이 아니라 무언가 공상적인 작품을 뜻한다. 화가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작품에 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낭만주의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유럽 예술형식인데 빛은 어떻게 표현하고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기에 어떤 사물과 상징을 넣아야하며, 전쟁통이라도 주인공은 빛나는 영웅으로 그려야 했다. 그런데 낭만주의는 그 규칙을 모두 깨뜨리고 작품에 표현한 상징이나 신화의 원래 이야기에 작가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담기 시작했다. 작가의 감정이 담긴 자유로운 작품이 점점 현대미술로 발전하게 된 기초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1800년대 초 산업화와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유럽대륙으로의 영토 확장, 세계에는 강대국들의 식민지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작품들이 굉장히 어두운 빛을 보인다. 그래서인지 작품 역시 로코코 미술에 비해 굉장히 어두운 빛을 보이고 있다.


1700년대 말, 프랑스는 루이 16세Louise XVI와 마라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를 처형하고 프랑스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듯했다. 그러던 중 1799년 나폴레옹 1세Napoleon Bonaparte는 프랑스 최고 사령관이 되었고, 바티칸의 교황까지 초대해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황제가 된 후 곧바로 스페인을 침공했다. 당시에는 지중해를 차지해야 유럽을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 군대는 스페인 왕자인 페르디난도 7세Ferdinando VII를 쫓아내고 나폴레옹의 형에게 스페인의 왕 자리를 주었다. 그러자 1808년 5월2일에 이에 반대하는 마드리드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하루만에 나폴레옹의 군대는 잔인하게 시민들을 진압했고, 다음날인 1808년 5월 3일 안타깝게도 마드리드의 시민들을 처형한다. 


스페인 미술의 거장이자 궁정 화가였던 프란치스코 고야가 바로 그 현장을 그렸다. <마드리드의 1808년 5월 2일>은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큰 사건이 있었는데 스페인 국민화가 고야가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고야는 <1808년 5월 3일>을 그리면서 여러 점의 습작을 남겼고, 다른 한 점을 더 그렸는데 그 것이 바로 <1808년 5월 2일>이다. 

고야의 작품 ><마드리드의1808년5월2일>

<1808년 5월 2일>은 <1808년 5월 3일> 보다 훨씬 더 잔인한 모습을 보여준다. 말을 탄 병사들이 살벌한 칼을 휘두르는 장면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랑스 병사들의 모습이 아랍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들은 바로 맘루크 경호부대인데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했던 왕조로 노예용병 출신이었던 자가 군주인 맘루크 용병을 기용해 스페인에 투입한 것이다. 


고야의 작품 <1808년 5월 2일>을 통해 그날 일어났던 참상을 더 잔인한 모습으로 더욱 사실적으로 보여주면서 많은 이들에게 분노를 들끓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고야의 생각과는 다르게 <1808년 5월 3일>이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고야의작품 <1808년 5월 3일>

고야는 <1808년 5월 3일>에서 무력하게 양팔을 벌리고 서있는 흰 셔츠의 사람을 제일 잘 보이게 그렸다. 이것은 마치 예수가 십자가에서 양팔에 못이 박혀 결려있는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그의 오른손에는 성흔을 연상시키는 상처까지 있다. 처형을 당하고 있는 스페인의 폭도들이 자신의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프란치스코 고야는 작품에 하나의 소점만을 적용해 그 뜻을 극대화했다. 그것이 바로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이 작품은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과 피카소의 1951년 작 <한국에서의 학살>에서 미국인에게 잔인하게 처형당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 두 작품 모두 고야의 구도와 배치를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피카소는 프라도 미술관 관장으로 있을 때 작품 설명에서 프란치스코 고야의 <마드리드의 1808년 5월 3일>을 직접 언급하기까지도 했다.

이전 07화 현대 미술의 출발점 프란시스코 고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