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아라곤의 푸엔데토도스 출신인 고야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의 스페인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유럽 근대화 시기에 활동했던 고야는 당시 서구의 미술은 국가나 공권력이 주도하는 미술아카데미를 통해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모범으로 하는 '고전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을 타고 있었다. 고전주의 미술은 대체로 선과 형태를 중시했고, 등장인물을 마치 고대 그리스 조각상처럼 완벽하게 미화하곤 했다. 심지어 프랑스의 미술아카데미의 경우 선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부설 미술학교에서 데생만 지도할 뿐 색체 수업은 아예 하지도 않을 정도였다. 고야가 미술가의 푸른 꿈을 키우던 시기, 스페인의 미술도 지나치게 고전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 아카데미는 취향과 개인의 독창성을 무시하고 천편일률적인 기준을 들이대곤 했다.
고야는 스페인 북동부 아라곤 지방 출신으로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사라고사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고 이후에 마드리드로 입성을 꿈꾸며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했으나 두 번이나 실패했다. 낙담한 그는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주로 로마에 체류하면서 르네상스의 대작들을 모사하며 실력을 연마했다. 이후 사라고사로 다시 돌아온 뒤 교회 제단화 등을 제작하다가 드디어 궁정화가로 일하던 자신의 처남 바예우의 도움으로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밑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발탁되어 마드리드로 정식 이주하게 되었다.
유렵의 궁정이나 귀족의 대저택은 장식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대리석 벽면의 차가움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태피스트리를 걸곤 했다.
<양산>은 카를로스 4세 왕세자 부부가 살던 엘파르도 궁으로 보낼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으로 제작된 것이다.
당시 태피스트리 그림은 대부분 그리스 로마 신화나 종교적 주제가 주를 이루었지만 고야는 이탈리아로부터 시집와서 적적한 터에 신분상 궁 밖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던 세자비를 위해 스페인 소시민들의 삶을 아기자기하게 담아내기로 했다.
그림 속 두 남녀는 각기 다른 복장을 하고 있는데 여자는 전형적인 프랑스 부유층 옷을 입고 있는 반면 초록 양산을 든 남자는 이 시기 스페인에 유행하던 '마호' 옷차림이다. 마호 Majo(여성일 경우 마하 Maja)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 살던 집시들을 부르는 말이었으나 점차 하층민으로 변변치 않은 일을 하며 생계를 이으면서도 빼어난 패션 감각을 뽐내고 살던 소위 '한량'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이들의 이른바 '집시풍' 패션은 스페인 대중과 귀족들 사이에도 크게 유행했다. 한편 당시 왕가의 혈통이 합스부르크가 아닌 프랑스의 '부르봉'으로 이어지면서 스페인 상류사회에서는 자연스레 프랑스 풍이 대세를 이뤘다.
고야의 초기 작품은 이 작품과 같이 화사하고 아름다운 색감으로 그려진 따뜻한 그림이 많다. 고야의 초기 작품들과 비교하면서 후기 작품들을 둘러보면 고야의 화풍의 변화에 의문이 생기기도 할 것이고 한 사람이 그렸다기엔 변화가 급격하다. 한 사람의 심경의 변화에 따라 그림의 색깔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될 것이다.
살다 보면 별의 별일을 다 격게되는데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겪어내느냐가 한 사람의 삶의 질을 천차만별로 다르게 살게 한다. 고야의 그림을 보면서 궁정화가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스페인 대표화가였지만 그의 말년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도 죽을 때까지 붓을 놓지않고 그림을 그린 프로다운 면모를 갖춘 스페인을 대표할 만한 실력을 갖춘 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