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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jo May 30. 2020

취업준비생의 마음은 쿠크다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늦었을 때다

01. 졸업 두 달 전

마지막 시험을 보고 있는 와중에 인터뷰가 두 개 있었다. 나는 영국, 싱가포르, 홍콩 그리고 두바이가 선호 지역이기는 했지만, 졸업 직전까지 수습변호사 계약 (training contract)을 구하지 못한 것이 조바심이 나서, 거의 스팸 메일 수준으로 많은 곳에 지원 이메일을 보냈다. 그동안 여자인게 완전 표시나는 영어 이름을 쓴 CV를 보냈는데 너무 연락이 안와서 이번주에는 성별 분간이 어려운, 내 영어이름의 짧은 애칭(?)을 쓴 원서를 보냈는데 일주일도 안돼서 두군데서 연락이 온다. 우연인지, 영국도 출신학교를 엄청나게 보는 것처럼 성별과 나이도 따지는 건지. 로펌업계 문제인지, 내가 원하는 인더스트리 문제인지. 나, 커버레터, 직장경력, 학교로는 어디가서 그렇게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굳이 알아서 상처받고 싶지 않다.

좋은 결과를, 빨리 원한다.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앞으로 채워 나갈 수 있는 부분을 보지 않고 자존심 상한다고 던져 버린 기회들을 후회한다. 공부와 경력 쌓기에는 때가 있는데 굳이, Training Contract 기간까지 채워야 하는데 타국 변호사들이 일정 요건을 갖추고 시험을 봐서 영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는 QLTS로 이래저래 문턱이 낮아진 이것이 최선인지 고민스럽다.


02. 졸업 한 달 반 전

당차게 인생의 2막이라 생각하고 직장을 박차고 나올때 퇴사 2주전까지 사표수리를 해주지 않던 전무님이 그러셨다. 그렇게 이뤄놓은 걸 다 놔버리는 건 현명하지 않다고. 자식 둔 아버지로서, 인생 선배로서 전하고 싶으셨을 그 생각을 그때는 떨떠름하게  머리로만 접수했고, 지금은 마음으로 느낀다. 수시로 고용불안정의 두려움이 목전에 차올라 숨막히게 할 때, 스팸메일처럼 뿌린 CV에 예전에 같이 일했던 아는 변호사들이 답장을 줘서 다급함을 들킨 것이 창피해질 때, 부모님 다음으로 그 전무님이 떠오른다. 끓는 냄비 안의 개구리가 되기 싫은 생각이 가득해서 윤택한 직장인의 삶이 없어지는 게 무엇인지 성찰이 부족했으니까. 그리고 삼십대 중반의 나이가 주는 부담감도 그땐 몰랐으니까.

나는 증명해보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잘 살아야 할 책임이 막중하다. 책임과는 별개로 이따금 힘들어지는 것은 누군가의 성과를 나의 시작과 비교하려 하는 내 못난 습관 때문이다. 이 공부를 해나가면서 자괴감의 구렁텅이에 밀어넣는 요인이 하나뿐이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지금 일을 하지 않아서, 커리어에서도, 인생에서도 뒤쳐지는 듯한 불안함, 매월 지속적인 수입이 사라진 데서 오는 심리적 위축, 엄마친구아들딸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들의 성공스토리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동안 시간을 들여 이뤄오고 경험한 것을 잊으면 안된다. 나의 경험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돈은 지금까지 벌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또 앞으로 더 열심히 벌면 된다. 남들이 인정해 주기 전까지, 자체적인 정신승리가 필요한 기간이 있다. 먼 친구의 윤택한 삶은 자극제로 끝나야지, 내 자존감까지 좀먹게 하면 안된다.


부모님의 입장은 좀 다르다. 새로운 길을 늦은 나이에 간다는 것은  지난 8년간 일 잘하고 돈 잘 벌었다는 사실도 지워버릴 정도로,  남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인가보다. 결혼도 않고 갑자기 공부하는 딸이 엄마 아빠는 설명거리가 많아져서 어디 내놓기 어려워졌다.  불효는 빨리 끝내야지. 아유 내가 아주 돈먹는 하마다.


03. 졸업 한 달전

졸업 한달을 앞두고 런던 밖까지 눈을 돌려 레쥬메를 뿌리기 시작하자 몇군데서 연락이 왔고, 발전사업 관련 유명한 파트너가 런던의 매직서클에서 독립한 부티크펌에서 오퍼를 받게 되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직원들도 모두 소개해 주고 출근 일자와 연봉까지 정하고 나왔다. 나오는길에 런던으로 가는 기차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아빠에게 전화를 하는데 눈물이 날 뻔 했다. 엄마는 내 인터뷰때문에 기도한다고 성당에 가 있고. 아빠, 나 여기 됐어 하니 아빠가 아이고 참 다행이다, 잘 될 줄 알았다, 하는데 기쁜 마음보다 복잡하게도 슬픈 마음이 더 앞섰다. 그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04. 졸업 주전

그러던 중 지원했던 두바이 어느 로펌의 managing partner가 런던에 오니 직접 인터뷰를 하자고 메일로 연락이 왔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에 첫번째 전화를 하니 처음에는 내가 여자라고 놀라더니, 다른 전화가 온다고 on hold였다가 끊기고, 두번째 전화하니 점심먹고 전화하겠다고 끊고, 점심 후 전화가 와서 통화하다 다른 전화가 온다고 on hold. 이런 위치의 사람에게 걸맞지 않는 엉망인 매너를 경험하고 나니 회사 분위기 검증이 필요한 것 같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하든지. 이번주 인터뷰를 화요일까지 못잡고 있다니. 저녁이 다 되어서야 crazy day 여서 미안하다니. 다음주면 원래 합격한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데. 저도 연락오는 회사 있거든요. 이 회사때문에 미뤄놓은 출근 날짜가 아깝다. 지치는 시간이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다음주에 나를 어느 도시로 보낼 것인지, 어디로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짐을 싸는 게 숨막힌다.

구직의 여정에는 알콜이 따른다

05. 졸업 1주전

뭐 그래도 이리저리하여 내 자리 하나 내주신다면 영혼도 팔 수 있을 거 같았던 구직의 시간에 미약한 시작이나마 끝이 왔다. 퇴사 2년만에 직업을 바꾸고 오퍼를 받게되어 기쁘고 선택지를 가질 수 있어서 감사하고 백수, 백수 이런 백수 없이 침대에 붙어있을 수 있는 여유가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은 늘 짧다. 바닥을 치고 올라올 줄 알았을 때 바닥 밑에 지옥이 있는 걸 알았으니까. 이후로도 나는 세번의 인터뷰를 더 하고, 맨체스터에서 런던에 있는 회사로, 또 다른 런던에 있는 회사로 두번이나 더 옮겨다녀야 했다. 인생이 이렇게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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