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가족,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2017년 나의 파란만장한 취업, 이사 및 비자 문제이다. 친구들도 가족도 그때는 모두 내가 한국에 그냥 돌아갈 줄 알았다고 했다. 나를 항상 응원해주셨던 아빠도 여러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그 정도 해봤으면 됐다고, 이제 그냥 돌아와서 쉬고 일자리를 찾아봐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졸지에 나는 맨체스터에서 급히 에어비앤비에 살면서 첫 직장을 다니다가 결국 집도 구했다. 하지만 비자 문제를 회사에서 제때 지원해주지 못하여 집 계약 보증금도 날리고 런던으로 돌아와 다시 구직 인터뷰를 다녔고, 결국 비자 만료로 한국에 두 달 돌아갔다가 다시 두 번째, 세 번째 회사에서 수습 변호사 (trainee solicitor, trainee)로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LPC (Legal Practice Course, 수습 들어가기 전 1년간 수료해야 하는 로스쿨 코스) 같은 반 동기들 25명 중 실제로 변호사가 된 사람은 5명 정도인 걸 생각해보면 나도 그때 퇴사 후 2년 투자의 성패가 달린 기로에 서 있었다.
01. 첫 번째 회사
2017년 졸업과 함께 취직한 회사가 있는 맨체스터로 이사를 갔다. LPC 코스 종료 후 2개월만 여유기간이 있는 학생비자 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내 회사가 아직 내 취업비자를 내줄 수 있는 이민국 스폰서십 라이선스를 발급받은 상태가 아니라서, 복잡하다는 단어로는 부족할 만큼 비자 문제가 얽히고 비용이 나오게 되었다. 회사는 Legal 500 Tier 1 회사이지만 boutique firm이다 보니 스폰서십 라이선스가 없었고, 인터뷰 때부터 요청했지만 서류 준비가 늦었고, 신청 후 8-10주가 걸릴 것이었다.
공부하면서 그리고 이 와중에 겪고 있는 스트레스는 변호사로 거둘 성취감 명예 돈이 부질없게 느껴질 정도의 피 말림과 가족의 고통이다. 대형 로펌에 미리 수습변호사 계약을 확보했다면 됐겠지만 나는 출국 전 주까지 일하다 왔으니. 미리 갈길을 열심히 알아보지 않은 내 잘못이었다.
변호사와 상담하고 나오면서 답답한 마음에 비 오는 런던에서 제일 사람 많은 Oxford circus거리에 멍하게 서서 눈물이 날 뻔했던 건 어쩌면 내 친구들의 긴 기다림에 비하면 평범한 고통인 것 같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 못하는 내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로스쿨 학장한테까지 연락했지만 직업학교에 가까운 영국 로스쿨들은 따지고 보면 비자 장사를 하는 입장이니 못 도와주는 건 당연, 학교는 그냥 다른 코스를 잠시 등록하라고 했다. 어떤 26년 경력의 비자 전문 변호사는 빨리 수속되지 않는 human rights application을 내고 취업비자 발급 시까지 비자 없이 시간을 때우라는 조언까지 했다.
런던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인 세인트폴 성당 옥상.이 도시에 자리잡는게 쉽지가 않다. 02.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회사
나의 비자 문제는 결국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내가 원하던 대로 corporate client를 상대하는 회사에 가게 됐지만 상대적으로 private client 대상 회사보다 취업비자에 대한 지식이 없는 유럽 마켓 대상의 회사라 더 힘들었다. 후일담이지만 맨체스터의 회사는 결국 제때 비자를 지원해주지 못했고, 나는 10월 첫 주말에 런던에 돌아와 세 군데서 인터뷰를 보았다. 인터뷰 봤던 한 회사의 파트너는 인터뷰 후 말하기를 네가 마음에 들고 안타까운 사정인 것도 알겠고 그럼에도 너는 꼭 성공할 것으로 보이니 희망을 잃지 말라고, 그런데 너무 시일이 촉박해서 비자 문제 해결이 어려우며, 회사가 현재 변호사 협회가 요구하는 실무실습에 필요한 세 분야를 커버를 못하는데 다른 회사에 한 분야 트레이닝을 위해 파견을 보낼 상황은 아니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두 번째 회사와 세 번째 회사는 합격했고 이 중 두 번째 회사에서 한 달을 일했으나, 비자 및 트레이닝 여건이 여의치 않던 중에 더 큰 회사인 세 번째 회사에서 offer를 받아 트레이닝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학생 비자 만료 하루 전에 보는 로펌 인터뷰는 다이내믹했다. 런던에서 제일 빨리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튜브(지하철)이다. 좀 더 빨리 가보겠다고 지나가는 블랙캡을 잡았다가는 시내 어딘가의 2차선 도로와 항상 공사 중인 어딘가에 갇혀 도착할 때까지 피가 마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두둑한 요금은 덤이지! 런던 시내는 오래된 건물 사이로 이차선 도로가 꽉 들어차 있어서 도로 확장을 하려면 뭔가를 부숴야 하는데 이 고고한 런던 시내에서 부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마지막 세 개의 인터뷰를 할 때 꽤 좋은 회사의 위에서 두 번째 분과 인터뷰가 잡혔는데 튜브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20분을 걸어야 하는 이상한 경로에 그날따라 높은 힐을 신은 나는 우버를 부르는 초보 런더너의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도착할 때까지 45분 동안 심장이 세배로 빨리 뛰면서 피가 서서히 마르는 경험을 했다. training contract을 구하려고 구직 마켓에 나가보니 채용시장에도 갑을관계는 존재한다. 트레이니 모집에 떨어져도 탈락 안내 메일을 보내주는 회사는 극히 일부이고, 특히 온라인 양식을 제출하는 방식이 아닌 경우 내 원서가 접수됐는지 안내 메일 같은 건 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 결과 안내 따위가 안 올 경우도 다반사. 붙어도 그래. 전반적인 트레이니 대우나 질의에 대한 답변의 속도는 아 나는 이 게임의 을일 수밖에 없구나라는 주제 파악을 하게 만든다.
이런 구직 과정에서 트래픽에 갇힌 을의 심장은 피가 돌지 않는다. 원래 모든 나쁜 경우의 수는 일어나라고 있다는 듯이 인도식 장례행렬이 런던 시내 한복판 Holborn역에서 끼어들지 않나. 하지만 회사에서 배웠듯 어려움이 있을 때는 구성원과 공유하는 것이 일차적 과제. 우버 기사 아저씨에게 이 난관을 공유한다.
아저씨 나 인터뷰 있어. 되게 좋은 덴데 붙고 싶어. 근데 거기 한시 십 분 전까지 도착해야 해.
그러자 세상 평온한 표정의 아저씨가 대답한다.
십 분 정도 늦어도 런던 트래픽 때문이라면 이해해줄 거야.
답답하다.
노노 이 회사는 안 그럴 거 같아. 차라리 안될 거 같으면 제일 가까운 튜브 역에 내려줘.
파키스탄 출신에 종교문제로 폴란드로 이민 갔다가 영국으로 왔다는 아저씨는 갑자기 폰까지 동원해 내비게이션 두 개를 켜더니 인샬라를 외치며 자기의 신이 나를 십분 전에 회사로 인도할 것이고 이 job도 줄 것이라고 템즈강 다리를 건넜다 돌아왔다 하며 달리기 시작한다. 아저씨 달려! 마지막 삼분 전까지 안심할 수 없었던 여정에서 우버 아저씨는 인샬라를 열 번쯤 외치며 합격을 빌어주고도 한시 십분 전에 도착했다.
살면서 위로는 엉뚱한 데서 받는다. 갑은 너무 바쁘거나 너무 잘나거나 을의 아픔에 굳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기에 을을 위로하는 건 지나가는 택시 아저씨나 주변인들이나 생판 남의 따뜻한 말 한마디이다. 인생의 바닥이 있으면 지금이 아닐까 하는 순간을 지날 때마다, 가장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을 만한 사람은 이유 없이 남에게 따뜻할 필요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자리를 잡아도, 아쉬운 것이 없는 힘이 생겨도, 시작하는 사람들을 살필 여유를 가진, 그리고 기본적인 것들은 지키는 매너 있는 어른이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03. 산뜻한 유학 광고 문구에 현혹되기 쉽다
누군가 변호사가 되겠다고 영국에 온다면 정말 잘 물어보고 알아보라고 하고 싶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두 팔 걷고 뜯어말려야 할 것 같다. 이미 training contract이 있거나, 대학 졸업 후 또는 로스쿨 수료 이후 수습변호사를 시작하기까지 시간을 대충 보내면서 기다려도 된다면 상관없다. 물론 나는 gap year에 부정적이다. LPC 과정을 같이 하고 나와 친분이 좀 있는 몇십 명들을 보면 바로 training contract을 시작한 애들은 1/4도 안 되는 것 같고, 내년 또는 이후 시작할 training contract을 기다리기도 한다. 이것은 LLB나 GDL 졸업생도 마찬가지이다. 내 GDL 그룹 친구 하나 - 퀸 메리 나온 영국인 - 는 중간에 2년이 비어서 세계여행을 다니고 있다.
영국 영주권이나 EU 국적이 없는 애들이 바로 영국에서 training contract을 시작한 건 나 말고 인도계 한 명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거나, 홍콩 출신이고 영국에서 법대를 나온 경우 홍콩에서 training contract을 하거나, paralegal로 일하거나, LPC시험에 fail 해서 비자 연장을 하고 있다. Fail 하는 애들도 의외로 많다. 기약 없는 paralegal도 워킹홀리데이 등으로 비자 문제가 해결돼야 할 수 있는 거지, 또 그 이후에 training contract 기회가 생겨도 26살이 넘었고 last granted leave에서 학사 석사 같은 학위를 따지 않았으면 new entrant가 아니기 때문에 그를 고용할 회사는 아래와 같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기본급 3만 파운드 이상
채용 공고를 정부운영 채용 사이트 등 두 곳에 28일 게재 등 Resident Labour market test 실시
이러는 기간 동안 유효한 비자가 없을 때는 본국에 돌아가 취업비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사실 이건 회사 입장에서는 돈 문제는 아니겠고 귀찮은 compliance 숙제거리를 안고 가는 게 골칫거리이다. 그리고 이건 그렇게 여러 달을 기다려줄 정도로 저비용 노동자로 수년간 일해줬거나, 다른 여러 면으로 신뢰를 심어줬어야 가능한 일이다. 영국 이민법상의 "New entrant to tier 2 (취업비자로 넘어오는 영국 내 젊은 학생들을 위한 조금 쉬운 자격요건)"는 GDL이나 LPC graduate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영국에서 학부나 석사를 졸업해야 적용 가능하다. 따라서 워킹홀리데이 같은 비자로 2년 커버할 수 없고, 영국 내에서 학위가 없다면, 기본급 3만 이상 주고 앞서 말한 Residential Labour Market Test를 하고 기록을 회사에 남겨놓는 회사를 구해야 한다. 따라서 좀 꼼꼼한 경영시스템을 갖춰야하고, 한명 정도 남는 HR/ Compliance 인력이 있으며, 외국인 고용에 따른 추가비용에 거부감이 없는 회사를 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니면 LLM 같은 석사를 이어가면서 파트타임 TC를 시작하거나.
2020년 여름에 학위를 시작하는 학생의 경우 학위 취득 후 일을 할 수 있는 유예기간 비자 (post study work visa)를 신청할 수 있다고 하니 2021년 여름에 Home Office policy guideline이 나오면 요건이 충족되는지 확인해보면 되겠다. 만약 로스쿨 졸업자도 적용이 된다면 training contract을 구하기가 쉬워질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트레이니쉽도 2020년 super exam (영국식 변호사시험, 그래도 2년 수습기간은 필요하다) 통과하는 애들이랑은 어떻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유학원과 학교의 마케팅용 유학 사례 인터뷰 제의도 받아보았지만, 산뜻한 광고문구로는 도저히 덮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과정과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쉽게 응할 수가 없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