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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jo Oct 16. 2020

서른셋의 로스쿨 학생

내가 저지른 일은 내가 책임지는 게 어른

01. 퇴사, 그리고 돈

2주간의 여름 휴가에서 돌아온지 이틀째에 호기롭게 사표를 던지고, 드라마에서처럼 임원 상담을 거쳐, 사직서를 반려당하고, 더 높은 임원 상담을 거쳐 백수가 되었다. 질척거리는 이별에는 한 달이 걸렸다. 그렇게 해서 엄마 아빠에게 나 유학가겠노라고 통보한지 한  반, 퇴사 후 2주도 안되어 런던으로 떠나게 되었다.


현금화 할 수 없는 부동산과 연금관련 상품을 제외한 현금자산을 정리하니 3천여만원이 나왔다. 첫 해 학비와 생활비 일부로 쓸 수 있으려니 했는데, 남들이 말하는 것보다 런던의 생활비는 훨씬 비쌌다. 어릴 때보다 서른세살의 내가 행복하고 안락하다고 느끼는 수준이 비싸진 것도 문제였다. 많은 학생들은 다른 사람들과 집을 함께 빌려서 방만 각자 독립공간으로 쓰는 shared flat에 주로 사는 것 같았지만, 혼자 산지 15년이 나는 다시 학생처럼 사는 게 쉬울 것 같지 않았다. 문화생활비와 식비도 아낄수록 행복의 질을 담보로 잡히는 수준이니 안 쓸 수 없었다. 


필요한 것만 많아져서 늙은 학생의 유학은 이렇게 해서 비싸지기 시작했다. 대충 정리해보면 월별 생활비는 아래와 같다.


(1파운드는 대략 1,500원)

집세: 900-1,250파운드

식비: 700 파운드

외식비: 200 - 400 파운드

문화생활비: 200-400파운드

교통비: 180-220 파운드

전기세, 물세, council tax (주민세): 80-230 파운드 (council tax는 학생은 면제)


총계: 1,960 - 3,250 파운드 (2,940,000 - 4,875,000원)


한국에서 세놓은 집에서 들어오는 월세와 부모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사이즈를 줄이고 동네를 런던 외곽으로 나가는 것 외에 크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것 같지 않다. 이미 나는 부엌과 침대와 책상이 한공간에 북적거리는 스튜디오에 살고 있었고, 학교에서 30분 거리의 런던 2존과 3존의 경계에 살고 있었으니 부잣집 딸처럼 산 것도 아니었다.


02. 그냥 떠나는 것도 괜찮아

돈 외의 다른 문제는 신경쓸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없으니 준비랄 것도 없었다. 준비가 없었으니 순탄할 리 없었고. 만난 지 두서너 달 됐던 그때의 남자 친구는 인천공항에 나와 검색대 게이트로 들어갈 때까지 손을 못 놓고 함께 울면서 작별인사를 다. 내가 라운지에 앉아서 보딩을 기다리는 , 그는 인천공항의 사람 없는 위층에 올라가 한 시간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뜨거운 연애가  빨리 식는다는 걸 아는 데에 일 년도 걸리지 않았다.

이민자들, 유학생들끼리 처음 을 때 서러웠던 썰을 풀어보면 무궁무진한데, 나에게는 2015년 겨울이 딱 그랬다. 9월의 끝자락에 도착한 런던은 이미 오후 네시면 깜깜해지는 겨울의 문턱이었고, 아침이면 자욱한 안개가 셜록홈스 영화 같이 희끄무레해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특히 집을 구하기까지 3주는 혼돈의 시간이었다. 8시간의 시차는 말할 것도 없고, 늦은 도전이 드디어 실감이 나 공황장애처럼 이따금 숨을 쉬기 어려웠고, 한국에서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온 답없는 애도 갑자기 멈추고 떠나온 커리어 - 내가 불평하며 회사다니던 것도 커리어라고 부를 수 있다면 - 처럼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 더 많이 깊이 생각했다면 떠나올 수 있었을까.

안개가 가득한 첫번째 집 앞 거리

03.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영어를 할 줄 안다고 적응이 쉬운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나가면 한국사람 조심하라더니, 괜한 말이 아니었다. 말도 안되게 전화 심카드 가격을 바가지 씌운 통신사 대리점의 아줌마도, 예약할때는 말도 없던 부가세를 얹어  확인도 없이 이름 모를 업체이름으로 카드 결제를 해놓은 민박집 아줌마도 다 한국 사람이었다. 새로 구한 집 부동산은 내가 외국인이라 신용이 없다며 갑자기 6개월치 렌트비를 요구하면서 납입 기한을 3 밖에 주지를 않았다. 한국에서 돈을 송금받을 계좌를 오픈하려니 은행에서 직원과 만날 약속을 미리 예약해야 한다며 준 제일 빠른 날짜가 2주 후였다. 내가 살아온 상식에는 좀 아닌데 영국에서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 속에서 천불이 났다.


집주인 복도 없었다. 첫번째 집주인은 주얼리가게를 하는 인도 가족이었는데, 나에게 말도 하지 않고 집에 수시로 들어와서 체크를 하는가하면 여섯달 계약 만료 후 이사나갈 때에는 영수증도 없이 수리비 명목으로 천파운드 (150만원) 정도를 차감하고 돌려주어 안그래도 마음이 쭈글해진 나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영국이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처음부터 친절하지 않았다.


04. 공부를 왜 또 해?

어쨌든 도착한 다음날은 학교 등록일이었다. 런던에는 이 학교 건물이 세 곳이 있는데, 너무 준비 없이 간 나는 다른 건물 도착해 지나가는 직원을 잡고 물어보고서야 엉뚱한 곳에 와 있는 걸 알았다. 물어물어 블랙캡을 타고 런던 시내에서 60파운드(9만 원)쯤을 내고 워털루역에 있는 캠퍼스로 찾아가 등록을 하고 나니 이미 오리엔테이션에 한시간이나 지각!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강사와 학생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오늘은 괜찮지만 다음부터는 10분 이상 늦으면 결석으로 친다는 강사의 뾰족한 코멘트가 빈자리를 찾아가는 내 뒤통수에 와서 꽂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국 영어 센트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지 벌써 8년이 지났고, 철저히 미국 영어 중심인 한국에서 대부분을 지냈으니 이 낯선 액센트가 편할 리가 있나.

학교 안의 뜰


하지만 멘붕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장래희망으로 국제변호사를 쓸 정도로 평생 하고 싶어 했던 법 공부가 막상 해보니 별로 행복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만 몰랐을 뿐, 직장생활을 8년이나 한 나에게는 치열한 공부욕심이 남아있지 않았. 열 살은 족히 어린애들이랑 섞여있는 것도 엄청 신나는 일은 아니었다. 나도 스무 살 때는 자기애가 컸고, 내가 제일 똑똑한 줄 알았고, 내가 어른인줄 알았지만 그것은 성장하는 과정일 뿐이다. 이거 저거 팔고 정리해서 온 서른몇살에게는 피상적 관계 유지 이상의 뭔가를 할 여유가 없었.

학교의 뒷배경은 삭막하다


다른 건 관심도 없었다. 나는 영국 내에서 법학사 학위가 없어서,1년 차에는 다른 나라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과 영국 내 비법전공 학사를 대상으로 한 Graduate Diploma in Law ("GDL") 코스를 마쳐야 했다. 이 학위를 취득하고 나면 Legal Practice Course ("LPC") 1년 과정에 들어갈 수 있고, 이를 마치면 수습 변호사(trainee solicitor)로 변호사협회에 등록하고 로펌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질 것이었. 물론 수습변호사 계약 (training contract)을 따는 것은 나의 숙제! 매년 영국에서만 33,000명이 넘는 법 전공자가 쏟아지는데 수습변호사 자리는 5,500여개밖에 나오지 않으니 수년간 쌓여온 지원자들까지 합하면 비자 스폰서십까지 필요한 늙은 외국인 여자인 나의 자리가 있을지.


하긴 뭐 그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GDL 과정 자체를 제때 졸업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엄청 많다. GDL 과정은 영국의 3년짜리 법학사 (LLB)를 1년으로 압축시켜 놓은 프로그램이라 악명이 높았다. 끝이 없이 엄청난 양의 암기량에 cheat sheet 도 들고 들어 갈 수 있는 시험인데도 총점 대비 80% 이상 득점자가 1% 미만이니까. 수업 과목은 아래 기본 법들이고 법령과 case law 강의 후 그룹별 소규모 세션에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일년만에 마쳐야할 법 종류만도 7가지나 됐다.

Contract Law
Criminal Law
Equity and Trusts
European Union Law
Land Law
Public Law
Tort Law

이즈음에 꿈을 꾸면, 달려가는 차 뒤에 흰 개 한마리가 목줄을 하고 혀를 길게 빼물은 채로 끌려가다시피 달려가고 있는 게 자주 나왔다. 무대공포증에 과민성 대장을 갖고 있어서 수업마다 이름을 불러 발표를 시킬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런 생경한 나라의 작은 방에 앉아있는 감상조차 사치일 정도로 도저히 다 읽을 수 없는 양의 과제들이 밀려들어 나를 잡아먹고 있는 현실처럼 나는 목줄에 묶여 끝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주말이 되어도, 읽어야 할 것이 너무 많기도 하고 어차피 같이 나가서 밥 사 먹을 친구 하나 없었다. 연말 휴가를 끼고 런던에 다녀간 남자 친구한테 스트레스를 풀면서도, 그의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의 도전은 그에게 탐탁지 않았고, 그의 현실 안주는 내게 답답했다. 예전 같이 일하던 부장님이 가족과 함께 파견 나와 계셔서 가끔 챙겨주셨을 뿐, 모든 인간관계가 영국 밖에 있었다.

어두운 런던의 겨울을 끼고 첫 여섯 달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버틴 건, 이것이 원망할 사람 하나 없이 온전히 내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남들이 다 말릴 때 고집부려서 한 내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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