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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jo May 14. 2020

Prologue: 인생의 2막에서 고민하다

7년차 직장인의 사춘기

01. 고갱 아저씨가 준 영감


2013년 어느 토요일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고갱전을 보러 가던 길이었다. 나는 덕수궁 돌담길에서 시립미술관 올라가는 길, 그리고 미국대사 공관 옆길을 사랑한다. 여기 살면 진짜 행복하겠어, 하며 괜히 퇴근길을 길게 돌아 오기도 했다. 밤에는 나뭇잎이 부스스 흔들리고, 별이 나를 내려다 보고, 사람은 없어서, 서울 안에 혼자 생각하며 걸을 수 있는 나만의 길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 몰랐는데 이 고갱아저씨는 역전 드라마 인생이었네? 금융권에서 일하다가 전업화가로 전환한 건 삼십대 후반이라니, 근데 또 화가로 이름도 멋있게 세상에 새겨놓고 말이다. 나는 역전드라마의 극적인 감동을 즐긴다. 인간의 불완전한 속성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스토리라서 더 돌아보게 되는 드라마가 더 기억에 남는 법이다. 너무 잘난 천재의 제때 이룬 성취는 배가 아프지 않나! 고갱은 일하던 증권거래소도 친척이 소개해줬다니, 이 아저씨는 참 인간적이기 이를 데가 없다. 백수십년 전에도 사람 사는 건 다를 것이 없다. 초등학교때부터 우리가 마르고 닳도록 배우는 줄잘서기 인사잘하기는 고갱 때나 지금이나 사회생활을 관통하는 성공법칙이었나, 역시.


2013 고갱 전시회. 서울시립미술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02. 서른살도 마흔살도 꿈꾼다

그 즈음의 나는 맛집을 찾아다니고, 일년에 두세번 안가본 나라를 여행하고, 또 일년에 서너번 해외로 짧게는 일주 길게는 삼주의 출장이 있었다. 차압 걸어놓듯 매월 자동 이체되는 몇가지 연금, 저축과 보험을 빼고는 신나게 소비의 기쁨이 벅차오르는 직장인의 생활을 만끽했다. 맛있는 것, 새로운 것도 열심히 찾아다녔다. 책도 열심히 보고 이런저런 자격증 공부도 하면서 내 의미를 찾으려고 버둥거렸다.


신경숙의 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 나오는 윤미루는 노트에 매일 먹은 것들을 기록한다. 그녀의 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하루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는 증명일 수도 있고, 언니를 따라가지 못하고 본능에 져서 또 꾸역꾸역 살아가는 죄책감의 발현일수도 있겠다. 내가 이 즈음 매일 돌아다니며 먹은 것을 적고, 의미없는 사진을 남기고, 블로그에 끄적거렸던 것도 그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먹은 것을 보면 그 날이 그려지고, 희미한 의미라도 남길 수 있으니까. 물론 그 안의 내 모습도 함께. 그렇게 하루 하루가 또 지나갔다. 


03. 덜 자란 어른


학부 유학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는 꽤 열심히 회사를 다녔다. 그것도 무려 8년이나. 회사원이 다 그렇겠지만, 일하면서 자아실현까지 할 수 있는 업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평범한 나에게 그런 행운이 있을리 없었다. 회사생활에 물린 나는 근본 없는 화가 치밀어오를 때가 종종 생겼다. 내가 모르는 새 무엇인가 쌓였겠지만 난 보통은 좀 무심하니까, 소소한 이유는 사라지고 화만 난 채 덩그러니 어쩔 줄 모르는 나만 남아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럴때면 껍데기만 성숙한 어른이 봉인해 두었던 날것의 불쾌감이 기억의 주인인 나마저 뜨악하게 한다. 이 즈음 나는 쓸데없이 나이에 좀 민감해지고, 일 못하는 동료들에게 엄격해졌고, 일찌감치 자리잡아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나는 말로는 파이낸스를 하네 인하우스 컨설팅을 하네 했지만, 싱가포르로 홍콩으로 낸 이력서에서 긍정적인 답은 여섯  동안 하나도 없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나의 스펙과 경력에 너그러웠다.


주제파악에는 남들이 해주는 소개팅이 제격이었다. 서른 전에는 눈이 높아서 결혼을 안했고, 서른 이후에는 직장 생활이 마음에 안차는데 주위 남자들은 다 나랑 비슷한 업종에 비슷한 회사 사람들이라 서로의 마음에 들지도 않았겠거니와, 철없고 역마살 낀 나의 연애상대가 될 리 없었다. 안그래도 업계가 좁아서 소개팅하기도 조심스러운데 이렇게 일만 하다가는 나이만 들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한 나는 아빠를 통해 친척분이 다리놔준 소개팅에 나가기로 했다.


어느 금요일 삼청동 뒤쪽 어느 식당에서 펄럭이는 양복을 입은 아저씨와 저녁을 먹고, 굳이 내가 사드린다는데 거절하고 그분이 사주신 와플에 커피까지 마시고 경복궁을 따라 걸어나오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아, 내가 나쁘지 않다는 학교를 나오고, 외모도 뭐 아주 예쁜 것은 아니겠으나 나름 괜찮게 관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름 가깝다고 생각한 이 친척 어른의 눈에는 이런 남자분과 내가 알맞은 상대로 여겨졌구나. 조금 속물스럽게 말하자면, 이 만남은 사실 소개팅보다는 선에 가까운 것인데,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조건이랄까. 세속적인 생각에 그 분에게는 죄송하고 나 자신에겐 한심하며, 주선해주신 친척분께는 꽤 오랫동안 즐겁지 않은 감정이 남았으며, 온 친척들에게 소문은 소문대로 나 상처뿐인 소개팅이 그렇게 서른 몇 살의 한 챕터를 장식했다.

사실 지나고 나면 다 별 것 아닌 일이고, 남자는 그 소개팅 전이나 후에나 자급자족해왔는데도 남이 보는 내가 어느 수준인지 경험하고 나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더욱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 무렵에 방황하면서 몇 번 갔던 신도림 사임당 점쟁이님의 말로는 내 사주는 옆의 사람 사주를 따라간다는데, 이렇게 불만 덩어리 회사원으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말로 먹고 사는 직업이라 낮에 떠드는데 지쳐 밤에는 과묵해져갔고, 시간이 날때는 별 다른 계획도 없이 좋은 노래를 늘어놓고 푹신한 베개를 깔고 엎드려 살얼음이 살짝 낀 바나나막걸리를 머그잔에 따라 두고 글을 쓰고, 기분을 풀고 좀 나아지면 또 계속 과묵한 어른으로 살 수 있었다.


04. 내 탓이오 

나는 파이낸스 전공에 투자 금융, 조달, 인하우스 컨설팅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회사 생활을 요약하자면 엑셀, 실사, 자문사 선정, 투자자 유치, 돈, 돈, 돈이었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입사 이후 사이클을 많이 타는 업종들을 거치면서 배운 것은 많지만, 시황의 바닥에서 끝도 없이 중언부언 이어지는 프레젠테이션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이런 곳에 앉아있는 나 자신에게 하아..화가 날때도 있었고, 계단에 앉아서 아빠에게 전화를 해서 진짜 이번주에는 때려친다고 하소연을 할 때도 있었지만, 집에 와서 늦은 저녁을 먹고 따뜻해진 배를 깔고 엎드려 생각해보면 사실 어쩌면 한심한건 그네들이 아니라 불평하면서도 꾸역꾸역 다니고 있는 바로 나였다. 예수님은 서른셋에 부활을 하셨다는데, 서른 둘의 나는 미약한 불평덩어리일 뿐이었다.


나이를 주고 돈을 산다는데, 직장 연차가 쌓이면서 일이 익숙해지고, 즐길만큼 일이 바쁘고, 돈을 적당히 벌게 되고, 원하는 것이 많아지면서 불만을 쌓아가면서도 꾸역꾸역 회사를 몇년을 더 다녔다. 여전히 회사는 요지경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가증스럽게 말을 바꾸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카미카제 용사들처럼 일방적 의사결정에 꾸역꾸역 따르기도 했다. 가늘고 길게 가는 애딸린 가장들을 상사로 두고 할 말 못하고 답답해 하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 미국 로스쿨 가는 시험도 보고, 한국 로스쿨 시험도 준비해서 적당한 곳에 합격도 했다. 하지만 돈과 나이가 아까웠고, 합격한 학교의 순위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 사이 부모님의 건강 문제가 있었고, 회사 일이 갑자기 다이나믹하게 재미있어지기도 하고, 잠깐의 연애를 하면서 몇년이 더 지나갔다.


Have the courage to use your own reason.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미성숙한 원인을 이성적 이해를 사용할 용기의 부재에서 찾고자 했다. 계몽의 모토를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성적이지만, 때로는 그 결론을 끄집어낼 용기가 없을 때가 많다. 고민을 할 때 pros와 cons을 따져 리스트를 만들어 보는 것도, 결론을 명백하게 만들어 주니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고, 적금을 깼고, 연금 저축 중 하나를 해지하고, 영국의 어느 로스쿨에 지원해서 합격을 한 후 2015년 아빠 엄마와 스페인 이탈리아에 엄마 환갑 기념 휴가를 다녀오는 길, 공항에서 폭탄급 선언을 했다. 나, 로스쿨 유학가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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