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벅지는 잘못이 없습니다!
청소년기 이후 최저 몸무게를 결혼 전 찍었다. 남들은 결혼 준비 때문에 의도적으로 뺀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전혀 아니다. 우울증이었다. 인간관계가 그리 힘들다더니.. 삼재가 맞나 보다. 저혈압인데 출근 직전 차 안에서의 심박수는 130을 찍었다.(걷거나 달리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수치) 아무튼 주변에서도 살이 너무 빠지니까 걱정 섞인 말을 건네기도 했다. 수척해지고 병색이 완연하니 병원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게다가 그즈음 퇴근 후 너무 피곤해서 땅바닥에서 누워 잠들었다가 새벽 2-3시쯤 씻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영향인지 오른쪽 고개가 돌아가지 않고 팔이 올라가지 않았다. 똑바로 누우면 통증으로 잠을 잘 수 없었고 MRI 결과 경추협착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결혼 후 바로 임신 준비를 예정하고 있던 나였으니.. 약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통증이 임신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지만, 약이 태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먹을 수는 없었다. 우울한 데다 어깨와 목 통증으로 잠을 잘 수도 없으니 8-10kg이 5달 만에 빠졌다.
그런데 문제는 내 하체였다. 분명히 바지가 커서 흘러내리고, 내 가슴은 쪼그라들다 못해 흔적기관으로 남아있는 상황인데도 여전히 하체는 튼실하다. 분명 나처럼 고딩 때 하체가 튼실했던 친구들 마저 30대 후반이 되니 종아리가 가늘어지고 허벅지 근육마저 빠진다고 했었는데,… 나의 하체는 빠지긴 했지만 기대만큼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엄마는 "하체가 튼튼해야 나이 들어 고생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엄마 종아리는 예쁘잖아!!) 한창 멋 부릴 20대에도, 더운 여름에도 나는 긴바지만 입었어야 했기에 내 몸 중 하체가 언제나 불만이었다.
그랬던 하체에 고마움을 느끼는 때가 있었으니!!!
때는 바야흐로 유산 후 한 달 정도 지났을 때다. 임신했을 때야 당연히 술을 못 마시니까 그러려니 했던 것도 슬슬 알코올 욕구가 샘솟을 때였다. 그때는 어디를 가도 아기들이 그것도 갓난쟁이들이 보일 때라 더 힘들었다.(저출산이라면서!) 드라마를 볼 때도, 길거리의 유모차에서 살포시 보이는 아기의 실루엣만 봐도 마음이 시릴 때었다. 아이는 없는데,,,, 배에 동그란 도넛이 남아있다. 아무리 살이 쪄도 배만은 나오지 않던 나인데(다 하체로 가서) 잠깐 임신했을 때 내 배에 지방이 모이더니 그 지방이 크림으로 변했나 보다. 샤워할 때마다 똑 튀어나온 내 배, 두툼해진 등을 보며 억울했다. 살은 남아있는데 아이가 없다니 ㅜㅜ 이 무슨 억울한 상황인가. 억울하니 좋아하는 술이라도 마시자 이거다. 문제는 언제부터 술을 다시 마시는 것이 좋은가?인데 유산하고 손목과 발목이 시려웠던 것도 한 달 정도 지나니 어느 정도 괜찮더라 이거다. 그래서 마침 남편과 사귄 지 999일째 되는 날을 기념 삼아 우리는 술을 다시 마시기로 계획했다.
임신했을 때 산책하며 마시지 못했던 새로 생긴 가게에 들어가 우리는 술을 마셨다. 아이를 지키지 못한 아쉬움, 그리고 막상 먹고 싶었던 가게의 안주가 별로라는 맛평가. 다음에 임신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주로 소주를 그리고 맥주도 마셨다. 임신했을 때는 그렇게 마시고 싶었던 술인데 막상 술을 마시니 그냥 그랬다. 그냥 술을 안 마셔도 좋으니 지금도 임신하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문득 했다. 그런 나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남편은 가끔씩 너스레를 떨면서 내가 다른 생각에 빠지지 못하도록 했다. 1차를 이자카야에서 먹고 안주가 별로여서 임신 전 자주 갔던 가게에서 2차로 미나리전과 소주 그리고 된장술국을 먹었다. 에어컨 바람에 혹여 관절에 바람이 들까 봐 꽁꽁 싸매고 마셨다. 그렇게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할 때였다.
내가 기억하는 건 욕조에 내가 가로로 누워있고, 욕조 위에 두었던 샴푸, 컨디셔너, 바디워시가 바닥에 떨어져 있으며, 머리를 부여잡고 “아야! 아야야 야야” 하며 외치는 내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 순간에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쾅!! 소리 후 아! 하는 소리가 나서 걱정된 남편은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난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아파서 ㅜㅜ 그래서 남편이 화장실에 들어왔다. 사실 나는 머리가 부딪힌 것보다 남편이 형광등 아래에서 발가벗고 있는 나를 보는 게 더 신경 쓰였다. (애는 어찌 만들었던 것인가?)
유산 한 내 몸은 이전과 다르다. 가슴은 커져있고, 등은 두툼해져 있었으며, 가느다란 상체를 자랑한 내 몸인데 배 둘레가 두리뭉실하고 하체는 더욱 튼실해 있었다. 그런 몸을 형광등 아래에서 보이고 싶었겠는가.(난 계속 남편한테 여자이고 싶다고!!) 가슴을 가리고 앉아있는데 남편이 젓가락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신혼인 우리는 혹시 발생할 불상사를 대비해 문을 잠그고 일을 보거나 샤워를 했다. 한 손에 젓가락을 들고 다가오는 남편에게 “보지 마!”라고 소리쳤지만 문제는 아래쪽이었고.. 위아래 모두 가릴 수 없으니까.(왜 인간의 손은 두 개인가?).. 그렇게 밝디 밝은 형광등 아래 유산 후 살이 쪄서 오동통해진 내 몸을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걱정인형인 나와 달리 남편은 언제나 “괜찮다! 걱정하지 말라.”라고 안심시키는 편이다. 그래서 욕조에 머리를 부딪혔을 때도 남편은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괜찮아. 많이 놀랐지? 걱정하지 마. “라고 했다. 그리고 가슴을 가려봤자 뭐 하냐고 놀리면서 웃었다. 그런데 문제는 머리가 너무 아파서 만져보니 혹이 엄청 크게 난 것이다. 만화에서 꿀밤 맞으면 혹이 생기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 유희적 표현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실제 근거를 바탕으로 한 표현인 것이다. 낙관주의자 남편마저 내 머리를 걱정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테스트를 했다.
1. 눈을 감고 두 손을 올리기(한 손만 내려갈 경우 문제)
2. 이마에 주름을 만들 수 있는지(못 만들 경우 문제)
3. 말을 잘할 수 있는지(아프고 놀라서 땡깡 부렸지만 괜찮음)
4. 35X27=? (이건 넘어지기 이전에도 못했으니 패스)
테스트는 통과했고 우리는 술을 마신 상태라 운전을 못하고, 시골이라 한 시간은 응급차를 타고 종합병원을 가야 해서 일단은 잠을 자기로 했다.
문제는 그다음 날, 욕조에 부딪힌 머리가 아픈 건 당연한데 왼쪽 허벅지가 엄청 아팠다. 잠옷바지를 내리고 봤더니 왼쪽 허벅지에 커다란 멍이 들었다. 40 평생 살면서 이렇게 시커먼 멍은 처음이다. 어제는 인사불성이 되어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바디 워시를 바르던 나는 균형을 잃어 미끄러졌고, 먼저 허벅지가 일차적으로 욕조에 부딪힌 후 머리가 부딪혔다. 즉 내 허벅지가 1차 충격을 흡수하고, 머리가 2차 충격을 받은 것이다. 만약 허벅지가 충격을 흡수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스란히 내 왼쪽 측면 머리가 욕조에 부딪혔으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도 아찔하다. 검붉고 시퍼랬던 내 허벅지 멍은 거의 한 달간 지속되었다.
그래, 내 몸의 모든 것은 다 기능이 있는 것이다. 두툼하고 근육질인 내 허벅지를 와이드 팬츠가 유행하기 훨씬 이전부터 입어 숨기며 업신여겼지만 그런 내 허벅지가 나를 살렸다. 아직은 내 하체에 불만이 있지만 무더운 여름, 나는 마음껏 반바지를 입으며 내 튼실한 하체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인간은 어디에서나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욕조에 머리 부딪혀 죽을 수도 있다니. 어디서나 안전한 곳은 없구나. 허벅지의 검푸른 멍을 보며 남편은 욕조 미끄럼 방지 패드를 샀다. 패드가 올 때까지 난 조심스럽게 욕조에서 씻었고, 한동안 욕조 PTSD라며 씻던 시간을 최대한 10시에서 11시까지 늦추어서 남편이 힘들어했다. (남편은 잠꾸러기)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몸상태에 더 신경을 쓰면서 기쁨이(태명)에 대한 생각과 슬픔도 여전했지만 우는 날보다 멍 때리고, 때론 웃는 날이 더 많아졌다.
젓가락 들고 나를 쳐다보던 남편이 생각나 키득 거리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