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침살을 가진 외톨이
나는 아직도 <가위손>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팀 버튼의 뮤즈들은 보통 창백한 얼굴에 다크써클, 부족한 사회성을 가진 캐릭터로 형상화되는데 그 시작에 해당하는 캐릭터가 바로 가위손 에드워드다. 팀 버튼의 작품 가운데 최고작으로 꼽히는 영화는 일반적으로 <빅 피쉬>인데 나는 영 <빅 피쉬>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팀 버튼이 그리는 희망보다는 슬픔에 더 깊이 공감했기에 나는 지금까지도 <가위손>이 나에게 건넨 위로를 기억하기 위해 종종 사운드트랙중 가장 유명한 곡인 'ice dance'를 듣곤 한다.
의상 디자이너, 범죄 심리학자, 작가, 그리고 개발자. 언뜻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 직종들은 마지막 하나를 제외하곤 내가 꿈꾸었던 직업들이다. 마지막 직업은 정말 놀랍게도 나의 현업이다. 꿈만 꾸었다기엔 나는 실제로 예술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미술 입시를 경험했었고, 대학에 갈 때는 수능 점수에 맞추어 사회과학대학에 진학해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지금은 개발자가 되었는데, 덕분에 나는 모든 곳에 속한 다이버전트이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외톨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됐다. 내가 에드워드에게 이입했던 이유는 진로때문이 아니라 내향적인데다 친구가 없는 성격적인 특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갈팡질팡하는 내 진로가 성격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으니.. 나는 붓을 잡았다가 펜을 잡았다가 타이핑을 하게 됐고, 그런 나를 신기해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인간은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감정보다 훨씬 강하게 느끼기 때문에 나는 다이버전트보다는 외톨이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됐다.
맞는 말을 하는 사주쟁이를 거의 보지 못한 덕분에 언젠가부터 사주를 잘 보지 않게 됐는데, 친구가 재미삼아 내 사주를 봐준 적이 있다. 한국인에게 현침살이 흔하다고는 하지만 나에게도 현침살이 있다고 했다. 현침살이라는 게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예술(붓), 문과(펜), IT(첨단기술)를 아우른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가위손을 갖고 태어났고, 가위손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본 셈이었다. 하지만 결국 성으로 돌아가 혼자만의 세계에서 평생 얼음을 조각하며 살 수 있었던 에드워드와는 달리 나는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야 했다. 차라리 에드워드처럼 평생 얼음을 조각하며 살 수 있었다면 진로 고민은 안해도 됐을텐데 나는 현침살의 세계를 떠돌아다닐 운명을 갖고 태어났고, 아직도 나의 세상을 찾아가고 있다.
인터넷 약식 검사로 알게 된 거라 신빙성은 없지만 내가 가진 색채 감각이 인구의 상위 1%라고 한다. 나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고, 그걸 몰랐기 때문에 종종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림을 그릴 때야 그게 엄청난 장점이었지만 예술중학교 입시에 실패하면서 미술을 그만두고 심리학을 전공했을 때 나는 내가 가진 예민한 감각이 나를 괴롭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소한 행동을 너무나 쉽게 포착했고, 희한하게도 그러면서 사회성은 떨어졌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사람의 마음이 작동하는 기제를 알게 되자 심리학적 지식과 나의 예민한 감각이 맞물려 인간을 바라보는 다른 차원의 시각이 깨어났다. 그건 나에게 있어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고, 잠시 범죄 심리학자를 꿈꾸었다가 그만두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나와 같은 감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고,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인간관계를 최소한으로 유지했다. 우여곡절 끝에 개발자가 되고 나서는 외부적인 자극이 적어서 좋기도 했다. 한창 개발자가 뜨거운 관심을 받는 직종일 시절 굴지의 IT 대기업에서 근무하다가 내가 스티브 잡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해고를 면하기 위한 방책으로 유학 준비를 했다. 그러니까 나는 날이 무딘 가위손인 셈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우여곡절 끝에 영국 리버풀 대학에서 1년여간 인공지능과 데이터 사이언스를 공부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을 한 끝에.. 나는 아직도 진로를 고민하는 중이다.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가위손들에게, 그리고 진로를 고민하는 가위손들에게 어쩌면 내 이야기가 퀀텀 오브 솔러스, 한 줌의 위로를 건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지만 생각하는 대로 안 살아지는 걸 대체 어떡하란 말인가요. 평생 진로를 고민해온 가위손이 다른 가위손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아마도 당신은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얼음을 조각했을 것이고, 당신만이 조각할 수 있는 얼음 조각이 있다면 다른 얼음도 조각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다. 나는 수많은 얼음을 조각하고 수없이 실망했지만 아직도 다음 얼음을 조각하고 있다. 언젠가 당신에게 나의 상처투성이 얼음조각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내가 조각하는 얼음 밑에서 당신이 눈을 맞으며 춤을 출 수 있길 바란다.
*<가위손>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