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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라우킴 Jul 22. 2020

비눗방울이 건네 준 위로

계절의 변화가 일어나는 겨울에서 봄 사이 며칠 동안 계속 비가 내렸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가진 아름다운 뉴질랜드도 햇빛이 내리비치는 맑은 날씨에만 본연의 색과 빛을 발할 뿐, 비가 많이 오는 우기에는 정말이지 매력이 없다. 해는 빨리 지고 바람은 끝도 없이 불고 하늘은 흐리다 못해 회색빛이다. 


날씨에 따라 기분이 쉽게 좌지우지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날은 우울해지기 싫어도 저절로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우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이따금 그림책에서만 보던 무지개가 눈앞에 장엄하게 펼쳐지곤 했다.  무지개는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느낌을 주기도 하니까 나는 그럴 때면 다시 마음속에 작은 희망을 품었다. 




일요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날씨 예보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오후에는 맑은 날씨가 예상될 것이라고 했다. 뉴질랜드에 온 후 남편의 일이 계속 바빠 그동안 식구들끼리 온전한 피크닉 한 번 하지 못했다. 늘 똑같은 일상에 반복되는 하루가 지루하다고 느끼고 있던 찰나 기분전환을 하러 공원에 가보기로 했다. 뉴질랜드 관광안내책자 Just Go를 뒤적이다 우리 집에서 차로 약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콘월공원을 발견했다. 공원에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면 좋겠다 싶어서 냉장고에 있던 재료들을 꺼내 김밥을 만들기로 했다. 김밥과 함께 먹을 간식과 음료수 그리고 피크닉에 빼놓을 수 없는 돗자리도 준비했다. 공원 잔디에서 돗자리를 깔고 김밥을 먹는 상상을 하니 왠지 신이 나서 어린아이처럼 흥얼거렸다.



하버 브릿지를 건너 공원으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구름은 서서히 걷히고 있었고 하늘도 파랗게 변하고 있었다. 날씨가 좋아지니 기분도 좋아져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예뻐 보였다. 지나가는 차들, 구름, 바닷가에 떠 있는 작은 보트, 무엇하나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좋았다. 


20분 정도 운전을 하고 도착하니 푸른 잔디와 나무가 함께 어우러진 공원이 보였다. 뉴질랜드 어디든 공원이 많다고 들었는데 아이들이 뛰어 놀기에도 정말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돗자리를 깔고 앉을 만한 적당한 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늘진 곳은 선선하지 못해 서늘하고 그늘 밖은 직사광선이 비춰 정말 뜨거웠다. 적정한 온도가 머무는 곳에 자리를 잡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내 초록색 줄무늬 돗자리를 펴고 앉아 도시락을 열었다. 김밥은 역시 야외에서 먹어야 제맛이다.


주말 오후인데도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각자 자리를 잡고 누워서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고 있거나 여유를 만끽하는듯했다. 오랜만에 야외에 나오니 묵직했던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둘째는 아빠와 공놀이를 하고 나와 첫째는 빙글빙글 돌며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우리 쪽으로 비눗방울이 날아왔다. '어? 어디서 날아오는 거지?'


어느 부부가 비눗방울을 만들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비눗방울을 발견한 아이들이 삼삼오오 그 자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들도 오랜만에 보는 비눗방울이 신기한지 달려들어 터트릴 기세였다.  


자세히 보니 부부는 마오리 사람들이었다. 뉴질랜드에는 다양한 인종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는데 마오리족은 뉴질랜드 원주민이다. 백인 인구가 제일 많은 뉴질랜드에서 마오리족은 전체 인구에서 16프로 정도 차지하는 소수 민족이지만 유럽인이 뉴질랜드 땅에 정착하기 한 참 이 전에 먼저 도착하여 살고 있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경계하는 기색은커녕 비눗방울을 계속 만들면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저씨 얼굴에는 시종일관 함박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부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았던 묵직한 감정이 서서히 녹아드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친절하게 웃어주는 그들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위로를 받았다. '이들도 삶의 터전을 마련할 때 모든 게 낯설고 힘들었을까?' 설령 그러한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보았다. 이 사람들의 표정과 태도에는 여유로움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바람에 실려 가는 비눗방울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어쩌면 내가 처음 이곳에 와서 마음에 품은 경계심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이방인으로써 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일종의 핑계였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비눗방울이 모든 것이 어렵기만 하고 우리 곁에 아무도 없는 것만 같은 공허한 마음을 달래주는 듯했다. 잔뜩 흐리고 지친 마음에 용기를 내보라고, 괜찮을 거라고 토닥여 주는 거 같았다. 그날은 뉴질랜드에서 느껴보는 가장 따뜻하고 평온한 하루임에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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