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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라우킴 Dec 16. 2020

그 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우리 집 대각선 방향 맞은편에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온 가족이 살고 있었다. 오후 시간이 되면 그 집 앞마당은 에너지 넘치는 삼 남매의 놀이터로 변신했다. 삼 남매는 자전거를 타거나 킥보드를 타며 즐겁게 놀았다. 워낙 조용한 동네여서 아이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올 때면 사람 사는 동네같이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삼 남매의 둘째 Gua(실제 이름은 더 길었지만 우리는 줄여서 ‘구아'라고 불렀다)는 학교에서 우리 첫째와 같은 반이 되기도 해서 좋은 이웃이자 친구가 되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거실 창문 너머 Gua 집 앞에 여러 대의 차가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후 매주 일요일이 되면 Gua 집은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우연히 Gua 엄마와 마주쳤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매주 일요일에 Gua 집에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 같던데, 혹시 무슨 모임 같은 게 있나요?"


"아, 우리 남편은 목사예요. 일요일이 되면 우리 집에서 함께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식사를 같이하죠."


Gua 엄마는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아프리카를 떠났고, 뉴질랜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은 본인들의 집을 교회처럼 사용하기로 했고,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가족들을 불러 모아 유대감을 쌓고 있었다. 그들만의 작은 공동체였던 것이었다.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한 주동안 있었던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좋아 보였다.




뉴질랜드에 도착해서 처음 몇 주는 설레었다. 몇 달은 여행 같았다. 하지만 1년 이상 살다 보니 고향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가족과 친구들이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각자 다른 곳에 살아도 왠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믿음으로 위로를 얻었지만 , 청명하고 깨끗한 뉴질랜드의 하늘조차 보고 싶은 사람들과의 거리감을 좁히지 못했다.


연고가 없는 뉴질랜드에서 의지할 수 있는 곳이 마땅히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교회에 가자고 제안했다. 어린 시절 일요일만 되면 부모님을 따라 교회를 다녔고, 타지 생활을 막 시작하는 가족이나 공부하러 온 유학생들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해 주는 곳이 교회라고 생각했다.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사항이 있었다. 현지 문화에 더 빨리 적응하기 위하여 뉴질랜드인들이 다니는 교회에 가느냐 아니면 한인교회를 가느냐였다. 사실 남편과 나는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 낯선 공동체에 발을 들여놓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웠지만, 용기를 한번 내보기로 했다.


집과 가까운 한인교회를 찾아보았다. 생각보다 많았다. 그만큼 한국 교민이 많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선택한 교회는 주일 예배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마치 문화센터처럼 여러 종류의 강좌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한국에서 오랫동안 음악 활동하신 분이 악기를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거나, 손재주가 좋으신 강사님은 미싱, 꽃꽂이, 뜨개질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과거에 쌓은 지식과 경험이 누군가의 무료한 일상에 한 줄기 빛과 희망으로 연결되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나이와 성별 제한이 따로 없었다. 젊은 사람부터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까지, 배움의 열정만 있으면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들을 위한 성경 공부 모임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것만큼 서먹했던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엄마들은 타지 생활하며 생긴 고민과 힘듦에 대하여 나누다 감정에 복받쳐 테이블 위에 놓인 티슈를 계속 뽑아야만 했다. 헤어지기 전에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모임으로 인해 육아로 가장 힘든 시기를 무난하게 보낼 수 있었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그들과 공감하며 함께 있는 시간은 메마른 땅에 단비 같았다.



몸이 힘들 때는 치료를 받거나 약을 먹을 수 있더라도, 마음이 힘들 때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느꼈다. 나에게 교회는 단순한 종교 모임이 아닌 정서적 안식처였다.


어느 공동체를 선택할 것인지는 개인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SNS가 잘 발달하어 있어 웬만한 정보는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아도 쉽게 얻을 수 있다. 일부러 한국인이 없는 외진 곳에 살거나, 한인 공동체에서 안 좋은 경험을 겪은 나머지 마음을 닫고 지내는 분들도 종종 계시다. 정답은 없다. 굳이 공동체에 속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와 관계를 잘 맺고 혼자 있는 시간을 슬기롭게 잘 버텨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타지 생활하면서 가장 힘들 때는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아닐까 싶다.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데, 소속감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마땅한 공동체를 찾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며 진심으로 소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다고 느끼는 건데도 말이다.


Gua의 집은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이민 온 가족들을 위한 정서적 안식처였다. 그 안식처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여러 사람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위로와 힘을 얻는 곳이었다. 나는 우리 집 앞에 차를 세워도 좋으니 조금 더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울고 웃으며 쓸쓸함을 달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조금 더 행복한 타지 생활을 꾸려나가길 바라며 우리 집 창문 너머로 그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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