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입학하고 1학년 마지막 학기가 끝나는 날이었다. 나는 교실 앞에 서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를 더 큰 세상으로 보낸 초보 학부모에게 하루는 일 년처럼 길었지만, 한해를 무탈하게 마무리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학기 초 마주한 우아한 담임 선생님과 데면데면함도 몇 번의 자원봉사 지원으로 웃으며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수업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교실에서 우르르 빠져나왔다. 친구들은 그동안 교실에서 만든 크고 작은 미술 작품을 한 아름 안고 나왔다. 선생님은 친구들과 함께 교실 밖으로 나와 아이들을 기다리는 학부모에게 마지막 인사를 짧게 전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땐 이런 말을 해주었다.
"Sofia's art is beautiful. Keep your eyes on her art works." (소피아 그림이 아름다워. 계속 지켜봐)
아이가 영어를 잘 몰라 학습에 뒤처질까 걱정으로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걱정과 달리 학교생활에 금방 적응하고 학습적인 부분에서도 큰 어려움 없이 따라가 주었다. 아이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선생님의 관심과 친구들의 배려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활동에 관심 있어하는지 면밀하게 지켜봐 주었던 것 같다. 아이가 미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가 유독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중이다.
어떤 아이는 미술을 잘하고 어떤 아이는 운동을 잘한다.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도 있고 노래를 잘하는 아이도 있다. 아이들이 가진 적성과 인지능력이 모두 다르기에 선생님은 학습능력만으로 아이를 평가하지 않는다. 가령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학급 대표가 된다거나 (학급 대표가 되는 기회는 일 년 동안 모두에게 골고루 주어진다), 선생님의 특별한 관심을 지속해서 받는 일은 극히 드물다. 선생님의 진짜 속마음을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내 눈에 비친 모습은 그러했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아이들의 자존감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생각한 이유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강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학교에서는 공부뿐만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통해 숨은 재능을 마음껏 펼칠 기회가 널려있었다. '틀리다’가 아닌 ‘다르다'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누군가 한 번쯤은 다양한 분야에서 칭찬과 인정을 받는다.
아이는 방과 후 수업으로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 저렴한 레슨비와 다른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배울 좋은 기회인 것 같아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연말이 다가오자 아이가 나에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그동안 피아노를 함께 배운 친구들과 학교 강당에서 작은 콘서트를 연다는 내용이었다.
콘서트 당일 부모님과 친구들은 관객이 되어 자리를 빛냈고, 친구들은 자기 차례가 다가오면 작은 키보드 앞에 앉아 실력을 마음껏 뽐냈다. 일 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보여주면 충분했다. 완벽한 연주법이나 기교는 없었다. 아이들이 서는 무대 또한 소박하고 간결했다. 무대라고 해봤자 작은 키보드와 의자가 다였다.
어떤 친구는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만 누르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연주를 하다 도중에 그만두기도 하고, 또 어떤 친구는 부끄러워 아예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떠한 객관적인 평가와 상도 없었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선생님은 참가한 모든 친구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씩 나눠주긴 했다.) 작은 무대 위에 설 기회와 긍지를 선물하고, 음악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해 보였다.
저마다의 속도에 맞추어 연주하는 아이들을 보니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하얀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피아노 경연 대회에 나가 잔뜩 긴장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를 보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실수할까 두려워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순간들. 상을 못 받을까 봐 애태우던 나날들. 결국 나는 내가 피아노를 진심으로 좋아하긴 하는 건지 자문했던 그 날까지 모든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It's OK to make mistakes, just relax and enjoy it!" (실수해도 괜찮아, 그저 편하게 이 순간을 즐겨봐!)
아이 차례가 다가오자 선생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아이는 무사히 연주를 마칠 수 있었다. 편안한 미소로 아이들을 다독여주는 선생님과 배움의 기회를 마음껏 누리는 아이가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