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반구에 위치한 뉴질랜드에서 크리스마스는 본격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길목에서 시작된다. 노래 가사로만 들었던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피부로 직접 느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릴 적에 엄마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거실 한쪽에 트리를 설치하셨다. 키가 작은 엄마는 발끝을 세우고 트리 가장 높은 곳부터 낮은 곳까지 크고 작은 오너먼트와 전구로 이쁘게 장식하셨다. 크리스마스가 무슨 날인지 잘 몰랐던 나도 그날만큼은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맡에 선물도 놓여 있었다. 꿈에 그리던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가신 것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꼭 나타났던 산타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생 4학년이 되던 해부터 찾아오시지 않았지만, 크리스마스 날 느꼈던 설렘과 기쁨이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진하게 남아있다.
이제는 엄마가 된 내가 아이들을 위해 조금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준비해 주고 싶어서 창고에서 트리를 꺼내 거실 창문 옆에다 두었다. 그러나 거실 창 사이로 비추는 뜨거운 햇살과 초록색 트리는 뭔가 맞지 않는 조합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 선물을 미리 사놓아야 할 것 같아 마트로 향했다. 한여름에 산타 할아버지가 두꺼운 산타복을 입고 나타날 리가 만무하지만 며칠 전부터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쇼핑몰에는 이미 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카트에는 저마다 가족에게 나누어 줄 선물을 가득 담아 계산대 앞에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지에서 가장 외로운 날은 이런 날이었다. 현지 사람들이 유난히 들뜨고 즐거워 보일 때. 한국에 있는 부모님과 동생이 무척 그리웠지만 아이들을 위한 선물과 카드를 고르며 헛헛한 마음을 달랬다. 계산을 끝내고 선물 포장하는 곳에서 후다닥 포장을 끝내고 차 트렁크 깊숙한 곳에 넣어 놓았다.
우리 가족은 크리스마스이브날 타우랑가로 떠나기로 했다. 타우랑가는 오클랜드에서 2시간 반쯤 떨어져 있는 곳인데 해발 232m 마운트 망가누이와 해변이 붙어 있는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휴양지라고 해서 발리나 코타키나발루 같은 느낌은 아니다. 바다와 산이 어우러져 있지만, 뉴질랜드 초여름에는 바닷물 온도가 아직 차서 발만 담글 수 있는 정도다. 바다 수영은 못하더라도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망가누이 산 정상에는 꼭 올라가고 싶었다.
고속도로와 굽이굽이 산길을 지나 마침내 타우랑가에 도착했다. 크리스마스이브와 당일에는 모든 상점과 레스토랑이 일찍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아서 숙소에서 먹을 음식을 준비해야만 했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장을 보러 타우랑가 시내에 있는 마트에 들어갔다. 마트에 도착하니 역시 많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딱히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보러 간 건 아니었지만 노릇노릇하게 갓 구워져 나온 통닭 한 마리가 보여 바로 카트에 담았다. 함께 곁들여 먹을 과일과 작은 케이크도 사서 인파를 빠져나왔다.
숙소에서 저녁을 배불리 먹고 거실에 놓여있던 티브이를 켰는데 마침 크리스마스 단골 영화 <나 홀로 집에 2>가 나오고 있었다. 주인공 케빈이 도둑들을 물리치는 장면은 언제 봐도 기발하고 영특하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아이들과 영화를 보고 있노라니 긴장이 풀려 피곤함이 몰려왔다. 영화가 끝난 후 아이들을 일찍 재우고 나는 지하 주차장에 내려갔다. 며칠 전에 차 트렁크에 숨겨놓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꺼내 와야 했기에.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 부스럭 부스럭 포장지를 뜯는 소리에 잠이 깼다.
“누나!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고 가셨어!”
“어? 이상하다! 우리는 지금 여행 왔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오셨지?”
아이들은 산타 할아버지의 등장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도 선물을 받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이불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혼자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약속한 대로 크리스마스 아침 우리는 망가누이산 정상에 올라가기로 했다. 산 근처 주차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 가볼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예상했던 대로 다리가 아프다며 힘들어하는 아이들 때문에 중간에 위기가 찾아오긴 했지만, 남편과 아이들을 번갈아 업고 안으며 우리는 정상을 향해 끝까지 올라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옷은 이미 땀범벅이 되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상에 다다른듯했다. 하늘과 바다의 색이 비슷해 경계선이 모호했고, 하늘을 수놓은 흰 구름은 금방이라도 바다에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풍경이 보였다. 우리는 두 다리의 피로감은 잊은 채 숨을 고르며 눈앞에 펼쳐진 대자연을 한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우리에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일깨워주었다. 때로는 우리의 의지와 목적과 상관없이 어디론가 떠밀려 향하기도 하지만, 그 항해가 무모해 보일지라도 누군가와 함께하면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마와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채 우리 네 식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영화 <나 홀로 집에 2>의 주인공 케빈이 도둑들을 용감하게 물리치고 나서 뉴욕 한복판에서 그토록 간절히 빌었던 소원, 크리스마스에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을 우리 가족은 이미 이루고 있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한 겨울이든 한 여름이든, 크리스마스가 어떤 계절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