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다. 우리는 서로의 집에 방문하면 가장 먼저 거실에 놓여있는 책장부터 찬찬히 훑어본다.
"언니, 이 책 샀네! 나도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나 이 책 사고 싶었는데! 어때? 추천할만해?"
그동안 안 본 사이 각자 읽고 좋아했던 책을 추천하며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는다. 동생과 나는 취향도 서로 비슷해서 책 이야기를 하며 시간 가는 줄을 몰라한다.
동생은 은퇴 후 작은 책방을 차리고 싶어 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우리는 교토에 건너가 책방 투어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좁은 골목을 걷고 또 걸으며 어딘가 꼭꼭 숨어있는 보물 같은 책방을 함께 찾아보자고 반짝이는 눈으로 약속했더랬다. 그러나 코로나가 창궐하고 나서 우리들의 소박한 꿈은 잠시 접어두었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던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생애 첫 독서모임에 들어가게 되었다. 강남에서 이사 온 친구 엄마가 동네에서 친구들을 모아 소규모 독서모임을 만들어주었는데, 전학 온 아이와 내가 단짝 친구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책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겨버린 것이었다. 외부에서 초빙한 선생님과 일주일에 한 번 책 한 권으로 토론하는 수업은 새롭고 흥미로웠다. 그러나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기에 너무 높은 진입장벽이었다는 것을 깨닫고야 말았다. 그때 읽었던 책은 주로 데미안, 노인과 바다, 햄릿, 베니스의 상인과 같은 고전이었다.
재미와 감동을 느끼려면 문해력이 받쳐줘야 할 터. 그동안 책을 읽지 않은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수준과 맞지 않은 책을 읽고 있자니 머리가 아프고 날마다 힘이 부쳤다. 사춘기 십 대 소녀는 속상했고 친구들에게 왠지 모를 열등감을 느꼈다. 문장을 읽고 해석할 수 없는데 독후감이 웬 말인가. 독후감을 쓸 때도 구색만 맞추는데 급급했다. 지나친 선행이 가져다준 실패였을까. 책은 나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안겨주기는커녕 열등감과 자괴감만 안겨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책과 점점 멀어졌다.
그러던 내가 불혹의 나이가 되어 독서법에 관한 책을 구해서 스스로 읽고 밑줄을 긋고 필사하며 블로그에 독서기록까지 남기고 있다.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니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매일 책을 읽는다.
데미안의 저자 헤르만 헤세는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고 했고 '그 길을 찾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라고 했다. 학창 시절부터 대학 졸업 후 취직, 결혼, 육아로 채운 긴 세월 동안 나는 나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맏딸, 학업에 성실히 임하는 학생, 고분고분 말 잘 듣는 회사원, 결혼해서는 한 남편으로서의 아내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느라 나의 내면을 낱낱이 살피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달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인생 2 막을 시작하는 나이를 마주하고 이제야 비로소 나에게 진짜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질문에 알맞은 답을 찾기 어려웠다. 나를 망각한 채 살아온 세월이 길었나 보다.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즐겁고 행복한 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책을 읽고 배우고 성장하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좋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언젠가부터 동생이 우리 집에 오면 나는 의식을 치르듯 파운드케이크를 굽는다. 각자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와중에 바쁜 시간을 쪼개 만나는 순간만큼은 잠시만이라도 달콤함에 젖어 쉼을 얻자는 마음으로.
파운드케이크를 먹으며 유년시절 때 못다 읽은 책을 이 세상 떠날 때까지 원 없이 읽어보자고 약속했다. 많이 흔들리고 연약했던 내면이 책을 만나 예전보다 더 단단해져 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마치 부드러운 케이크 반죽이 오븐에 들어가 서서히 단단해져 가는 것처럼. 동생이 언젠가 책방을 차리게 되면 나더러 디저트를 담당해달라고 한다.
"언니는 파운드케이크를 만들어줘. 이거 진짜 맛있다.”
"그래, 얼마든지 구워주마!"
고소한 커피 향, 달콤한 빵 냄새,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는 내가 할머니가 되어서도 계속 맡고 싶은 향들이다. 그 향에 취해 나의 진짜 인생 책도 찾을 계획이다. 내가 좋아하는 향을 누군가에게도 전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박력분 210g, 실온에 둔 버터 200g, 설탕 180g, 달걀 4개, 베이킹파우더 6g
① 오븐을 200도로 예열한다.
② 큰 볼에 실온에 둔 버터를 넣고 거품기로 1분 이상 푼다.
③ 설탕을 ②에 2-3번 나누어 넣으며 섞는다.
④ 달걀을 ③에 1개씩 넣어 거품기로 충분히 섞어준다.
⑤ 체 친 베이킹파우더와 박력분을 넣고 가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걱으로 뒤집듯이 섞어준다.
⑥ 파운드 틀에 유산지를 깔고 반죽을 채운다.
⑦ 오븐에 넣고 45분 정도 구워준다 (오븐 종류에 따라 시간은 달라질 수 있어요:)
* 젓가락으로 가운데 부분을 깊숙이 찔러서 반죽이 묻어 나오는지 확인한다. 묻지 않으면 다 익었다는 신호! 식힘망에 올려 식힌 다음 먹기 좋게 잘라 맛있게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