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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혜 Mar 21. 2023

슬픔의 힘에 대하여

- '단지'를 떠올리며 -

  몇 해 전 나는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펫카페에 간 적 있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대여섯 마리의 개들이 일제히 몰려와 컹컹 짖어 당황스러웠지만 대개 잠깐의 관심을 보이다 내 곁을 떠났다. 오직 딱 한 강아지만 빼고서….

  갈색 털이 라면처럼 구불구불했던 그 강아지의 이름은 ‘단지’. 은색 목걸이 위에 빛나던, 주인이 정성껏 새겨 넣었을 법한 글자를 보고 알았다. 


  그날 단지는 처음 만난 사람이었을 뿐일 나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쫓아다녔다. 


  “단지야! 이러지 마!”


  사람처럼 두 다리로 껑충 선 채 앞다리로 나의 배를 꾹 누르며, 내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움직이면 왼쪽으로 움직였다. 관심을 돌려 보려고 다른 강아지를 향해 공을 던져 봐도 자신이 모든 공을 다 낚아챈 뒤 쓰다듬어 달라며 뛰어왔다.


 “주인이 맡겨 놓고 떠나서 그래요. 지금 3일째거든요.”


 어쩔 줄 모르며 곤란해 하는 내 뒤로 음료를 들고 지나던 카페 사장님이 안타까움이 담긴 말투로 말했다.


 “외로워서 그러는거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주인을 잃어 허전한 마음에 그러는가 싶어 좀 더 쓰다듬어 주고 안아줬다. 몇 시간 뒤 카페를 떠날 때도 단지는 하염없이 철조망 끝까지 달려왔고 구멍 사이로 나를 보았다. 


  그렇게 조금 특이했지만 서서히 잊혀져가던 단지를 다시 떠올린 게 된 것은 2년 전이다. 그때 나는 먼 타국 땅에 홀로 있었고, 사랑했던 사람과 기어코 이별을 하게 되었다. 수업 중이던 나는 학생들이 왁자지껄 웃을 때도 눈물이 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수업이 끝나고 눈치 빠른 학생 몇이 다가와 서툰 한국어로 ‘선생님, 왜 울어?’, ‘왜 그래, 선생님?’이라며 물어왔을 때 나는 정말 사람이 목 놓아 운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울었다. 내 입에서 그렇게 큰 울음소리가 날 수도 있음을 처음 알았고, 사람 눈에서 그렇게 많은 물이 멈추지 않고 흐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바로 인간 ‘단지’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곁에 있지 않고서는, 아니, 누군가를 사랑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가 내가 진짜 사랑했던 사람과 동일하든 그렇지 않든, 계속 그 사람과 함께 하던 안정감을 비슷하게나마 느껴볼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몸의 반이 떨어져 나간 듯한 고통과 심장이라는 풍선에 바람이 다 빠져버린 듯한 공허함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 시절 나는 친구를 불러 코믹한 드라마들을 연달아 보았고 친구가 내어 준 무릎이 흥건하게 다 젖을 만큼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 친구에게 정말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그래도 그런 시간이 있어 그나마 버틸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제 와 ‘단지’를 생각하면 마치 나인 것 마냥 마음이 아프다. 만약 몇 년 전으로 돌아가 펫카페에서 ‘단지’를 다시 만난다면, 그 애가 안아달라는 대로 안아주고 예뻐해 달라는 대로 예뻐해 줄 것 같다. 그 애가 필요로 하는 날 그냥 옆에만 있어줘도, 정 줄 대상이 되어 주기만 해도, ‘단지’는 버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걸 내가 강아지 ‘단지’가 되어 보고서야 알았다.


 역시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는 비슷한 상황에 처하는 것 만한 게 없나보다. 슬퍼봐야 슬픈 사람의 심정을 안다더니만. 부정할 수 없는 슬픔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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